아침독서 원칙_좋아하는 책을 읽어요(2)
아침독서 원칙_좋아하는 책을 읽어요(2)_학원, 과외 없이 집에서 워킹맘 엄마와 공부하고 있는 초등 삼 남매 이야기입니다. <집에서 자라는 공부 습관> 10화
"처음엔 한자나 공부에 관련된 거라 만화책도 사주고 했지만 만화책 보느라 부르면 대답도 안 하고, 할 일을 잊어버리는 모습을 자주 봐요. 그리고 줄글책은 읽으려고 하지 않아요. 만화책을 못 보게 해야 할까요?"
초등교사로서 정말 자주 받는 질문입니다. 2019년도에 이 부분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고자 만화책과 독서습관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많이 찾아보았습니다. 그때도 관련 연구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지금 다시 찾아봐도 많지는 않습니다만, 알게 된 것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이들이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쉽고 재밌기 때문이죠. 만화 속 대화는 구어체고 짧은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림이 곁들여 있기 때문에 읽어야 할 글자가 줄글책보다 훨씬 적습니다. 이 대사를 누가 말하는지, 어떤 표정과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 쇼츠나 유튜브 영상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처럼, 아이들도 만화를 읽다 보면 불러도 듣지 못할 정도로 몰입합니다.
만화의 가장 큰 폐해는 완전한 문장을 읽어내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만화는 묘사 글이 거의 없고 대부분 짧은 단어나 구로 감정을 표현한다. 짧은 단어에 익숙한 아이들은 긴 호흡을 필요로 하는 문장을 읽어내지 못하므로 책과 멀어지게 만든다. 아침독서 시간은 만화만 보고 글 위주로 된 책은 눈길도 주지 않는 아이나 책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경험을 통해 책 읽기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시간이다. 만화만 보던 아이들이 아침독서 시간을 통해 글 위주의 책을 읽으면서 즐거운 경험을 할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아침독서운동의 4원칙에 나온 설명입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저는 아침독서운동에 관심 가지고 실천하기 시작한 2009년부터 2019년까지 거의 10년간은 교실에서 일절 만화책을 못 보게 하였습니다. 제 자녀들도 유아기였기 때문에 좋은 그림책에만 노출되도록 했고, 집에 그 흔한 why 시리즈도 사다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화 시장은 더 활성화되었고, 저희 아이들이 글을 익히게 되면서, 도서관을 데려가면 만화를 읽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받아라 바람 풍!" "없어져라 사라질 소!" 하면서 마법천자문 놀이를 하는데 그런 만화를 읽지 말라고 하기엔 곤란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제가 교사를 시작하던 2009년도는 Why시리즈나 마법천자문시리즈가 판매 정점을 찍으며 만화시장(정확히는 학습만화 시장)이 더욱 활성화되던 때였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2년 『국내·외 만화산업 현황』을 보면, 당시 출판 만화 중 학습만화 비중이 약 70%(종수 기준)였다고 합니다. 학습 만화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것이 당연한 게, 학습만화, 즉 학습과 만화가 결합된 형태의 책이 2000년도부터 생기기 시작하였기 때문이겠죠. 그 이전까지는 만화책은 재미만을 위한 '딴짓'의 영역이 대부분이었고, 가정의 분위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끼며 만화책을 봐야 했는데, 학습 만화로 인해 재미만 있는 게 아니라 지식도 얻는다(학부모 입장에서는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형태로 콘텐츠 산업이 확장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학습 만화의 활황에 대해 박인하 만화 평론가는 '학습 만화에서의 학습은 단편적 정보의 집적일 뿐이며 그나마도 휘발되는 것이며, 학습만화의 활황은 교육조급증에 걸린 대한민국 학부모를 타깃으로 한다'라고 비판합니다.
“일단 학습만화를 열심히 읽는 어린이들은 어른들도 깜짝 놀랄 만한 정보력을 보여준다. 과학만화를 탐독하는 어린이들은, 과학적 지식을 줄줄 이야기해 부모를 놀라게 한다. "우와, 학습만화가 효과가 있네.", "우리 아이는 학습 만화를 보고 한자를 줄줄 외워요." 속임수다. 만화를 통해 반성 없이 자연스럽게 암기되는 단편적 정보를 지식이라 부르기 민망하다. 그런 단편적 지식이 진짜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또 암기된 지식을 활용해야 한다. 우리의 뇌는 필요해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오래 남고, 그다지 필요가 없으면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학습이란 단편적 정보의 집적이 아니라 비판적이고 반성적 사고에서 시작된다.
유독 우리나라 부모들은 이 ‘학습’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안심한다. (...) 만화와 너무나 잘 어울려 마치 한 몸처럼 느껴지는 ‘학습’이라는 단어는 어린이들의 학습에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한 마케팅으로 시작되었다. 학습만화의 메인 타깃은 바로 ‘교육조급증에 걸린 대한민국의 학부모’다. (...) 학습의 강박에서만 벗어나면, 만화는 우리에게 자신이 지닌 풍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어린이들은 만화를 통해 세계를 배운다. - 학교도서관저널, 『만화책 365』기고글에서 발췌
경험은 부족하지만 독서교육을 제대로 하겠다는 마음은 가득했던 초임 교사 시절에는에게는, 박인하 평론가와 같은 학습만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 매우 끌렸습니다. 당시 교사 모임 선생님들에게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들으며, 동의했고, 학급에서는 만화책을 금지시켰습니다. 독서 시간에 만화책을 절대로 못 읽게 했으며, 집에서도 읽지 않도록 학부모님들께 권하기도 했습니다. 교실에 학습만화 자체를 두지 않았지요. (제가 사비 주고 산 양질의 줄글책, 그림책을 많이 읽도록 했지요.)
그런데 사실 저도 (학습 만화가 없어서 못 봤을 뿐이지) 만화를 보면서 자란 세대이고(천계영작가의 언플러그드보이, 오디션, 월간 만화잡지 밍크, 윙크), 웹툰도 즐깁니다. 그런 제가 만화를 금기시하는 것이 아무리 교육적인 이유에서라 할지라도 마음에 꺼림이 조금 있었습니다. (물론 박인하 평론가도 학습 만화를 비판하는 것이지 만화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명랑 만화나 작가의 개성 있는 만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무엇보다 제 자녀가 태어나고 한글을 익히면서 6~7살 즈음에는 마법천자문을 읽기 시작했는데, 무조건 만화를 못 읽게 하는 게 답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녀를 키우면서 확실하게, 제가 '만화에 대해 아는 것'과 '현실에 적용하는 것' 사이의 괴리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만화책을 보게 둬도 될까요?"라는 질문에 담긴 내용은 크게 2가지일 것 같습니다.
첫째, 학습 만화가 공부에 도움이 될까요?
둘째, (학습 만화든 아니든) 계속 편하고 쉬운 만화만 읽으려고 하고 줄글책을 더 싫어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
일본에서 이뤄진 연구로, 수학 시험에서 특정 문제를 틀린 학생들에게 문제의 원리를 설명하는 자료를 다음 세 가지 형태로 제공했다고 합니다.
A그룹: 만화로 된 자료
B그룹: 글과 사진으로 된 자료(교과서 양식)
C그룹: 줄글로 된 자료
그러고 나서 시험을 봤을 때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집단은 교과서 양식(B그룹)이었습니다. 그다음이 만화로 된 자료를 읽은 아이들이었고 글로만 적힌 자료를 읽은 아이들의 점수가 가장 낮았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아이들은 모두 "가장 이해하기 쉽고 좋은 자료가 무엇인지"의 설문에서 만화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교과서 양식이 가장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만 아이들은 만화식 교재에서 가장 강한 읽기 동기를 느끼는 것이죠. *1
한 선생님의 아들은 그리스로마신화 만화책에 푹 빠져 살더니, 유럽의 미술과 역사 쪽으로 관심이 확장되어 관련 줄글책도 어렵지 않게 읽었다고 합니다. 만화가 학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이런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맞다고 생각합니다. 해당 지식에 대해 긍정적인 정서가 형성되고 관심 영역의 줄글책 읽기로 확정되는 것이죠. 아이뿐만 아니라 성인도 낯설고 생소한 분야(법이나 역사 영역, 양자역학 같은 과학 영역 등)는 만화로 접하는 것이 진입 장벽이 낮고 이해에도 도움이 됩니다. 실제로 출판사를 운영하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학습 만화를 만들 때 관련 전문가들을 통해 내용 검수도 매우 엄격하게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회, 과학 등 교과서가 모두 만화로 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만화책은 지식을 접하는 초기 단계에는 유용하지만 양에 비해 담을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한 비효율성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이들이 지식의 초기 단계에만 만화책을 읽고 그다음부터 줄글책을 읽을까요? 아닌 경우를 훨씬 더 많이 봅니다. 그래서 만화를 계속 읽게 뒀다가는 줄글책을 읽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죠.
아래 사진은 친구네(초등교사) 교실의 만화책 책꽂이입니다. 아이들이 하도 만화책만 보려고 해서 몰래 숨겨두었다고 합니다. 그 숨겨진 책장 속 만화책 사진입니다. 만화책 너덜너덜해진 거 보이시죠? 그만큼 아이들은 편하고 쉬운 것을 선택합니다. 사실 아이들 뿐만이 아니죠. 성인도 긴 텍스트보다는 영상이나 짧은 글에 더 쉽게 손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부 부담을 늘 안고 있는 학생들이 만화책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죠.
다음 글에서, 만화를 좋아하면 정말 줄글책을 안 읽게 되는지에 대해 이어서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학습 만화 이외의 만화(웹툰 등)에 대한 상황도 함께 살펴봤으면 합니다.
*1_김은하, 『독서교육 어떻게 할까?』, 학교도서관저널에 소개된 일본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