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배낭여행
맛있는 뷔페 음식을 잔뜩 먹고 온 다음에는 라면이 먹고 싶어 진다.
심지어 그 라면이 뷔페 음식보다 맛있게 여겨지기도 한다.
여행도 비슷해서 매일 뭔가 멋지고 새롭고 근사한 것만 찾아다니며 본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 소화시키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릴없이 골목길을 걷거나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을 하거나 공원 벤치에 앉아 멍 때리거나 숙소에 뒹굴뒹굴하는 시간 같은 것 말이다.
몰도바는 와인으로 유명해서 보통 와이너리 투어를 많이 한다.
고작 이틀 반나절에 시간을 쪼개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 오늘은 어제 못한 걸 하기로 했다.
혼성 도미토리에 묵으면 가끔 친구를 잘못 만나는 경우가 있다.
어제는 밤새 코를 골든 어떤 남자 때문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숙소에서 어제 먹고 남은 피자를 데우고 오이와 복숭아로 아침을 먹었다.
일요일 재래시장을 안 가 볼 수 없어 설렁설렁 구경 가서 납작 복숭아 4개를 800원 주고 샀다.
모든 과일이 키로에 천 원이 안 된다.
수박과 멜론이 얼마나 좋은지 침만 흘리다 말았다.
집에서는 LG에서 나온 ‘틔운’에 딜을 수경으로 키워 먹는데 5cm만 자라도 뿌듯해서 뜯어먹기 바쁘다.
여기는 30cm도 더 되어 보이는 딜이 키로에 400원이 안 된다.
복숭아 봉지를 들고 공원 야외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달콤하고 나른한 음악이 흘러나와 커피를 마시며 두 어시간 앉아 있었다.
누구는 할 것도 볼 것도 없어 여기를 그냥 스쳐 지나가겠고 누구는 바로 그것 때문에 이곳에 오래 머물겠다.
오늘 아침에 만난 한국 학생은 어젯밤에 와서 오늘 오후에 아테네로 넘어가야 해서 새벽에 나가 둘러보고 왔다고 했다.
어제 만난 한국인 남자 청년은 일주일째 머물고 있단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미술관과 박물관을 한 곳씩 들렸다.
어느 도시에 가던지 미술관이 있으면 들러보는 것은 이제 내 여행의 필수가 되었다.
숙소에 들어와 쉬는데 남자 세 명이 앉아 몰도바 샴페인을 나눠 마시며 우크라이나 전쟁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 말 중간에 우크라이나 만 내 귀에 들렸다.
나눠 준 샴페인은 맛이 좋았다.
전쟁만 아니었으면 다음 행선지는 우크라이나 오데사가 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웃나라는 전쟁으로 참혹한데 오늘 하루 이곳은 평온했다.
일상의 평온과 안전이, 오늘 하루 아무 일 없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몰도바에 있으니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내일은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간다.
드디어 일행을 만난다.
고작 3주 여행했는데 어쩐지 이번에는 아주 긴 시간이 흘러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