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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순영 Mar 08. 2021

에르메스 깁스

사노라면

결혼 전이었고 남편이 군대도 가기 전이었다.

청량리역에서 만났으니 우리는 분명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어딘가 놀러 가기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역 앞의 백화점에 들어간 것은 아마도 차 시간이 남아서였을 테고.
지금이라면 가까운 커피숍에 들어가 차 한 잔 마시면 딱 좋았을 만큼의 시간이었을까?
여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백화점 입구 매대에  색색의 스카프를 구경했던 것으로 봐서 초가을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스카프를 구경하고 있는데 남편이 맘에 드는 것을 하나 골라보라고 했다.
주머니 사정이 무척 가벼웠던 우리가 백화점에서 무언가 산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남편의 말에 나는 물색 스카프 한 장을 골랐다.
만 원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싸지 않았다.
그전에는 스카프를 사 본 적이 없었다.

스카프를 매어 본 적도 거의 없었다.
사실 그 당시 스카프는 치마만큼이나 내게 낯선 아이템이었다.
지금이야 여행 다닐 때 화려하고 멋진 스카프 두 어장은 필수품으로 챙기고 시간과 장소에 맞춰 어느 정도 내게 어울리게 하고 다닐 줄도 알지만 이러기까지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그랬음에도 내가 스카프를 고른 것은 남편이 처음으로 내게 뭔가 선물해주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모든 기억은 확실치 않다. 세월이 흐르고 한때 선명했던 기억도 흐릿해지면서 시간의 경계가 사리지고 기억의 언저리 어디쯤에서 서로 중첩되고 섞여서 만화경처럼 조각조각 반짝이는 기억의 파면만 떠오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남편이 내게 스카프를 사 준 일이고 내가 그 많고 많은 스카프 중에서 물색의 스카프를 골랐다는 것이고 그 순간의 기억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후에도 남편은 어쩌다 한 번씩 내게 선물을 했다.
시장 리어카에서 샀다며 수줍은 표정으로 내게 내밀던 이 천 원짜리 귀걸이는 귀에 물려 고정하는 것이어서 하루 종일 하고 다니면 귀가 빨갛게 짓물렀는데도 귀걸이에 박힌 분홍 유리알이 빠져나갈 때까지

열심히 하고 다녔다.

쑥쓰러움 많이 타는 남편이 귀걸이를 사 왔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놀라워서 나는 귀가 아픈지도 몰랐다.
이미테이션 목걸이를 하면 목에 두드러기가 생기는 줄도 모르고 남편이 사 준 목걸이를 모든 옷에 하고 다니기도 했었다.
결혼하고도 한동안 그 귀걸이와 목걸이는 소중한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가 잦은 이사에 어느 순간 사라졌는데 남편이 처음으로 사 준 스카프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건 그 스카프를 내가 별로 하고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스카프를 내게 어울리게  활용하는 법을 몰랐다.
게다가 지금의 나라면 그런 스카프를 고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그 당시 나에게는 취향이라는 것이 없었다.


얼마 전 남편 회사에서 회장님 부부가 참석하는 부부 동반 모임이 있었다.
일정 직급 이상의 승진을 축하하는 만찬회였는데 사령장과 꽃다발을 받고 회장님 말씀을 듣고 유명 호텔 셰프가 주관하는 근사한 코스 요리를 즐긴 후 유명 뮤지컬 가수의 노래를 듣고 행운권 추첨까지 꽤나 공이 많이 들어간 행사였다.
만찬이 끝나고 돌아가는 배우자들에게 선물이 하나씩 주어졌다.

 그동안 남편을 내조한 공을 치하하는 의미이자  앞으로도 계속 부탁한다는 의도가 다분한 선물이군, 생각했다.
집에 와서 열어 보니 골드바탕에 시계 모양이 프린트되어 있는 에르메스 실크 스카프였다.
명품에 관심이 없는 나도 샤넬이나 루이뷔통 정도는 들어 알고 있지만 에르메스라... 넌 누구니?
스카프는 분명 비싸고 근사해 보였는데 골드 계의 색이 내게 어울리지 않아 다음 날 잠실에 있는 에르메스 매장으로 교환하러 갔다.

"스카프를 선물 받았는데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교환하러 왔어요."
"네 교환 가능하시고요, 스카프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교환 가능하세요."
"다른 걸로도 교환할 수 있어요? 그럼 이 스카프 가격대에 교환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요?"
"이 스카프 가격대로는 명함지갑 정도요?"
"음... 이 스카프 가격이 얼마나 하는데요?"
"59만 원이요."
"네... 그럼 지갑은 얼마쯤 해요?"
"반지갑은 90만 원부터 시작하고요 장지갑은 조금 더 비싸고요."
"아... 그럼 그냥 스카프로 교환할게요."

뭐 이렇게 되었다. 스카프 가격이 59만 원이라니. 그런 가격의 스카프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59만 원을 주고 뭘 사라고 한다면 당장 턴테이블을 바꾸거나 다음 여행에 쓸 피엘 라벤 배낭을 하나 사고 남는 돈으로 여행 가서 반지갑을 하나 사도 되겠구먼 하고 속으로 구시렁거려봤자 내 손에 들어온 것은 한 장의 스카프일 뿐.
인생에 하나쯤 엄청 비싸고 고급스러운 실크 스카프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생각하고 목에 두르고 나간 첫날, 사진을 찍어 자매들에게 보냈더니 돌아온 말이 가관이었다.


"언니야 누가 보면 에르메스 깁스한 줄 알겠어.”

이 스카프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목에 두르면 어느새 스르르 풀려버린다. 목에 고정시키려면 묶거나 스카프 링으로 고정해야 할 판이다.
스카프 링은 또 얼마나 비싼지 그냥 질끈 묶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도 모양이 잘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이걸 어디에 해야 어울릴까?

나는 주로 옷을 구제 샵에서 구입한다.
그러니 이걸 구제 숍에서 산 만 오천 원짜리 검은 원피스에 해야 하나 만 원에 산 회색 니트 위에 해야 하나 이 만 원짜리 패딩 안에 해야 하나.

그렇다고 여행 갈 때 하고 갈 수도 없고.
동생 말로는 화장품이 묻거나 땀이 묻으면 바로 드라이를 해줘야 한단다.
하! 이렇게 까다롭고 다루기 힘든 녀석이라니.
외출할 때마다 스카프가 들어 있는 박스를 열고 한참 들여다보다 그냥 면 스카프를 둘둘 말고 나간다.
목에 착 감기고 땀이 묻거나 립스틱이 묻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착하고 예쁜 내 애정 스카프를.

봄이 오면 남편이 사 준 스카프를 하고 나가야겠다.
강물처럼 흘러갔다 돌아오는 행복하고 간지러운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물론 가끔 목에 에르메스 깁스도 할 생각이다.

땀이 묻거나 말거나  화장품이 묻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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