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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순영 Feb 02. 2022

아버님의 플렉스

사노라면

IMF 때 직격탄을 맞은 시아버님의 석재공장은 그 후 몇 번의 심폐소생을  거치며 근근이 명을 유지하다가 종국에는 사망하고 말았다.

석재공장이 잘 될 때에도 시아버님의 관심은 가족들이 살 집이라든가 부동산 같은 재산형성에 없었으므로 석재공장이 사망하자 남은 건 내지 못한 세금과 빚뿐이었다.

그즈음 시어머님이 단기 기억장애 진단을 받으셨다.

마침 그즈음해서 시아버님이 고향땅에 좋은 묘터를 찾으셨다.

하필 그 묘터가 삼 천평 밭의 윗부분이어서 졸지에 평생 관심도 없던 땅을 덜컥 얻게 된 시아버님은 농막을 짓고 호두나무를 심더니 시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아버님은 의욕에 넘치셨다.

어린 호두나무 사이에 고추농사를 짓고 닭을 풀어 키워 우리가 내려오면 닭을 잡아 푹 고아주시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콩 농사를 지어 두부도 만드시마 하셨다.

경기도 안성까지 가서 명인이 만든 가마솥을 사드렸지만 우리 중 누구도 아버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우리가 내려갈 때마다 시아버님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죽여 끓는 물에 털을 뽑고 불을 피워 가마솥에 닭을 고아 줄 리가 없음이 불 보듯 뻔했다.

닭이 달걀을 낳으면 장에 가져가 파시겠다고도 했으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님은 어머님의 단기 기억장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다.

결국 고추농사는 3년 만에 접어야 했다.

소득은 없고 몸만 죽어라 고생한 후 얻게 된 결론이었다.

야심 차게 마련한 건조기며 농기구는 본전도 못 뽑고 건조기는 여전히 방치 중이고 농기구는 저가로 팔려갔다.

시어머님의 단기 기억장애가 치매로 발전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어머님은 제일 먼저 부엌일에 손을 놓으셨고 청소와 빨래에서 멀어지더니 나중에는 배변처리마저 포기하셨다.

어머님이 기저귀를 차는 순간 평생 동동거리며 해왔던 모든 일에서 완전히 물러나신 셈이었다.

어머님이 얻은 자유만큼 아버님의 삶에 족쇄가 채워졌다.

농사는 물론이고 부엌일, 청소, 빨래, 누군가를 씻기고 돌보는 모든 일이 아버님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평생 받아만 봤지 해본 적은 없었던 일이었다.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아버님의 삶은 가문 땅의 곡식처럼 낱알을 맺지 못하고 시들어 갔다.

의욕은 꺾이고 체력은 바닥이 나고 영혼마저 쪼그라들었다.

갈 때마다 생기를 잃어가는 아버님을 보는 일은 갈 때마다 아이가 되어 가는 어머님을 보는 것만큼이나 괴롭고 쓸쓸한 일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버님은 자식들 앞에서 영 면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시아버님이 큰댁의 제사를 가져왔다.

큰며느리가 없는 큰 댁의 제사를 나이 든 큰어머님이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하자 둘 째인 아버님이 내가 하마 하신 것이다.

며느리도 없고 시어머님의 상태가 갈수록 나빠지는 와중에도 일 년에 8번 이상 해야 하는 제사를 하시겠다고 한 것이다.

제사를 가져오신 이후 제사는 시아버님의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되었다.

농사도 청소도 어머님을 돌보는 것도 제사보다 우선일 수는 없었다.

특히 일 년에 두 번 온 가족이 내려가는 추석과 구정의 제사는 아버님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행사가 되었다.

추석과 구정 당일, 아버님은 새벽부터 일어나 병풍을 치고 상을 피신다.

내가 부엌에서 간단한 전을 부치고 국을 끓이는 이른 새벽부터 상 위에 과일 윗부분을 잘라 올려놓으시고 포와 떡의 포장을 벗겨 놓으신다.

코로나 전에 친척분들이 고향 방문 차 내려왔다가 들릴 적에는 새벽부터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신다.

올 사람들이 다 모이면 바야흐로 아버님의 위엄과 권위가 기를 피는 시간이 온다.

이건 여기에 놓아라

저건 저기에 놓아라

아니다.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자, 술을 따르고, 수저는 저기에 올려놓고 젓가락은…


큰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므로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아버님이 제사상 앞에서 어깨를 피고 돌아가신 조상 얘기를 할 때면 모처럼 얼굴이 해사하게 살아나시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 봐야 삼정승도 되어 보지 못한 조상 얘기건만.

코로나 이후로 추석이나 구정이 되어도 드나드는 친척분들이 없다.

우리 부부와 동서네 가족 막내 시동생만 모이는 조촐한 제사상이다.

그래도 구색을 맞추느라 세 가지 전과 세 가지나물, 찐 생선 한 마리, 과일과 떡, 포를 올린다.

그리고 경상도 제사상에 절대 빠지면 안 되는 문어가 있다.

이 문어 얘기를 하기 위해 아주 긴 서사를 풀었다.


나는 경상도 집안 남자와 결혼하고 나서야 제사상에 문어가 올라가는 줄 알게 되었다.

전라도 집안인 친정 제사상에는 문어가 올라가지 않는다.

경상도 제사상에 문어란 다른 것은   가지 생략해도 되지만 이것만큼은 절대 빼면  되는 가장 중요한 음식이다.

명절날 영양시장에 나가면 정말 커다란 문어를 볼 수 있는데 다리 하나만 해도 일 킬로로가 넘고 가격도 오만 원이 훌쩍 넘는데 제사상에 문어를 통으로 올릴라 치면 꽤나 큰돈을 써야 한다.

친척들이 올 적에는 제법 큰 문어를 사기도 했지만 우리 가족만 모여하는 제사에 그렇게 크고 좋은 문어를 살 필요까지는 없어 작은 문어 한 마리를 사는 것으로 타협을 봐오던 중이다.

올해는 특히 문어 시세가 높아 시아버님께 말씀드려 제사상에 문어를 올리지 말자고 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구정 이틀 전에 내려가며 전화를 드리니 제사상 상차림 장을 이미 보셨단다.

해서 일단 내려가 아버님이 사신 품목을 확인하고 빠진 것만 장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김치냉장고 하나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검정 비닐을 발견하고 말았는데 못해도 4킬로, 20만 원은 훌쩍 넘을 것 같은 문어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하~~~

나도 모르게 아주 커다란 한숨이 나왔다.

이 시점에 아버님은 왜 이렇게 큰 문어를 사신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의문은 금방 풀렸다.

나라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돈이 나왔던 것이다.

남편에게 한숨 섞인 말로 문어 얘기를 하니 남편의 대답이 웃겼다.

문어는 아버님의 플렉스야.


그랬다.

문어의 크기는 모처럼 가욋돈이 생긴 아버님이 자식들 앞에서 보일 수 있는 오랜만의 플렉스였던 것이다.

끝내 친척분들이 아무도 오지 않아 아버님은 모처럼 큰 마음을 먹고 산 문어를 나눠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신 나와 동서가 반씩 나눠 가져왔다.

큰 문어의 살은 야들야들하고 맛있었다.


구정은 지났고 시어머님이 없는 집에서 혼자 남은 아버님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잠을 자고 혼자 제사를 지내시겠다.

남은 생에 유일하게 남은 의미 하나를 붙잡고 아버님의 날들이 약하게 빛을 내며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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