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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순영 Jul 03. 2020

온기

여행 이야기 -러시아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어떤 장소가, 혹은 단어이든 노래이든 그 어떤 것이 마음속으로 느닷없이 들어와 꽂히는 순간이 있다.
대개 그런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데 사소하고 별 것 아님에도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던 마음에 들어와 일단 박히고 나면 오랜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그 인상이 흐려지지 않는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을 만나게 되는데 인생이 그렇듯이 아름답고 행복한 인상만 새겨지는 건 아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희미해지지 않아 입술을 지그시 깨물지 않고서는 떠올릴 수 없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인상도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런 인상이 더 많을지도.
마음속에 즐겁고 행복한 인상이 밤하늘 별처럼 총총히 박힌 삶이라면 살면서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어느 한순간을 꼽으라면,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 도착한 첫날 아침이 떠오른다.

낯선 도시에 이른 아침에 떨어진 나는 경계심과 긴장으로 몸과 마음이 한껏 얼어붙어 있었다.

숙소를 찾아 막 횡단보도가 없는 길을 건너려고 할 때였다.

한 노파가 내 옆에 다가와 말없이 내 팔을 잡았다.

나는 흠칫 놀라 노파를 바라보았는데 노파는 잡은 팔에 힘을 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소의 의미를 이해한 나는 노파의 팔을 잡고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길을 건넜다.
노파는 나와 함께 길을 건넌 후 '땡큐' 하고 환한 미소를 던지며 멀어져 갔다.

순간 딱딱하게 얼어있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모르는 타인에게 자신의 안전을 맡길 수 있는 나라라면 얼마나 따듯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후 조지아는 내가 만나는 여행자마다 꼭 권하는 나라가 되었다.
지금도 눈을 감고 가만가만 그 장면을 떠올리면 내 팔에 자신을 맡기고 천천히 길을 건널 때 노파의 손에서 전해지던 따듯한 온기가 여전히 내 몸에 남아 내 영혼을 덥혀주고 있는 것 같다.

여행을 하면서 모르는 타인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될수록 그 순간의 인상은 더 선명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살다 보면 잘 아는 사람을 믿는 것 마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러시아 포트바이칼의 작은 동네를 걷다가 만난 어린 소녀 한 명.
내 귓가에 딸랑이를 흔들며 소리를 들려주던 그 몸짓이 너무 예뻐 무심히 손을 내밀었는데 의심 없이 내 손을 잡던 그 작은 손에서 내가 얼마나 커다란 안도와 따스함을 느꼈는지 그 어린것은 모르리라.

여행 내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바이칼의 소리들, 빛깔들 냄새들인 줄 알았는데 정작 내 마음이 사로잡힌 건 어린 소녀의 따듯한 온기였다는 것을 돌아와서 알았다.


여행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라고 그녀들이 내게 속삭이는 것 같다.

따뜻한 온기를 품은 손을 내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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