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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순간

몰타여행기

by 신순영


여행을 하다 보면, 실은 일상을 살아갈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길을 잃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동선이 꼬인다거나 어렵게 목적지를 찾아갔는데 문을 닫았거나 실망하게 되는 경우, 맛집이라고 해서 갔는데 음식이 맛이 없었다거나, 남들은 모두 알차고 충만한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하루를 한 것 없이 흘려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문득 마음이 길을 잃어버린다.

말 그대로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목적지를 못 찾고 헤매거나 이상한 곳에 잘못 내려 고생하거나 차를 잘못 타거나 하는 경우다.

내 경우 두 가지 모두 해결방법은 하나다.

가만히 앉아 시간을 갖는 것이다.

집에서 여행을 꿈꾸며 기대하고 준비하던 시간을 떠올려 보면 여행 중인 것만으로도 이국의 낯선 공기를 들이마시고 오감으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여행이 가진 장점이다.

대개는 자꾸 무얼 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문제가 생긴다.

잠깐 숨을 고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있다 보면 다시 길이 보인다.

사실 그런 순간을 넘기고 나면 여행이 훨씬 편안해지고 자유스러워진다.

진짜 길을 잃은 경우에는 문제가 다르다.

밤이거나 외진 곳이거나 차가 드물게 다니는 곳이거나 하필 인터넷이 안 되는 곳이기라도 하면 심각하다.

안전과 생존과 관련된 문제라서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

나는 모로코 토드라협곡에서 묵을 때 한 번 바보 같은 짓을 한 적이 있다.

숙소 맞은편 산에 노마드텐트가 있다는 말을 듣고 혼자 올라갔는데 산이 높지 않고 노마드인들의 텐트까지 길이 비교적 쉬워서 금방

올랐다.

거기서 끝냈으면 되었는데 나는 욕심을 좀 내었다.

조금 더 올라가서 반대쪽으로 내려올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뒤로 노매드 텐트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면서 방향 감각을 잃었다.

분명 왔던 길인데 다시 돌아가려니까 방향을 모르겠는 거다.

설상가상으로 인터넷도 안 돼 구글맵을 볼 수 없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버렸다.

등골이 오싹 해지면서 식은땀이 흘렀다.

여행 중 평정심이 깨지면 반드시 사고가 난다.

난 잠시 숨을 고르고 내가 처한 상황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오전이었고 물이 있고 인터넷은 안 되지만 맵스미가 있고 완충을 한 보조배터리가 있었다

맵스미는 내려가는 길을 보여줬지만 사실 내 앞에 길이라고 할만한 건 없었다.

나는 맵스미에 의지해서 방향만 잡아 내려갔다.

당황해서 발목이라도 접질릴까 봐 온 힘을 다해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나는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노매드여인을 만날 수 있었고 그녀는 내게 내려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모르는 산은 아무리 쉬워 보여도 절대 혼자 가면 안 된다는 교훈을 그때 얻었다.

게다가 나는 정말 심각한 길치다.


몰타에 와서 하루는 짧은 트레킹을 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2시간 반, 4000년 전 거석문화가 남아있는 유적지에서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었다.

아주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시내를 벗어나 모처럼 한가라고 고요한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돌아오는 버스를 잘못 타서 엉뚱한 곳에 내렸다.

버스가 있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고 타도 되는 버스 두 대가 서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내릴 사람이 없어서 그냥 간 것 같다.

타겠다는 아주 적극적인 제스처를 했어야 됐다.

그림을 그리며 기다리면 되겠지 하는 느긋한 마음은 사라지고 버스가 오는 곳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혹시 또 놓칠까 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되었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한식을 먹으려고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이러다가 저녁도 못 먹는 거 아닌가 하는 짜증이 들기 시작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주위를 살폈다.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 있는 작은 광장.

주민들 몇 명이 지나가고 노인 몇 명이 광장 벤치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작은 마을에 산다는 것은 마을 주민 모두와 친구가 되는 일일까?

이렇게 작은 나라에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지금 한 나라를 한 도시의 여러 구역을 방문하는 기분으로 다니고 있다.

오늘은 종로구, 내일은 송파구, 그다음에는 서초구, 이런 식으로.

버스를 못 잡으면 택시가 있었다.

이 작은 나라에서는 아무리 멀어도 한 시간 남짓이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드로잉북을 꺼내 광장 건물 위로 내려앉은 구름을 그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버스가 왔고 버스에 오르던 승객 한 명이 나에게 손짓을 했다.

버스에 올라 구름을 좀 더 그렸다.

오늘 나는 버스를 잘못 타서 잠시 길을 잃었던 것이 아니라 잠시 새로운 장소를 방문했던 거라고, 어쩌면 다른 여행자들은 모두 스쳐 지나갔을 그런 장소에 잠시 머무르는 행운을 누린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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