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하지만 할머니_사노 요코
그림책은 아이들만을 위한것이 아니다.
도서분류의 체계의 다양화를 통해 그림책의 영역을 확장하자.
어린이용 책이라는 고정관념을 넘어서서 모두를 위한 책으로써 그림책에 날개를 달아주자.
도서관을 들어선다. 도서관에서도 유아 서가를 좋아한다. 많은 도서관의 유아 서가는 신발을 벗고 편안한 자세로 볼 수 있도록 온돌 좌식으로 해둔 곳이 많다. 추운 겨울 뜨뜻한 방바닥에 앉아 책을 읽다 보면 그 편안함에 졸음이 몰려올 때도 있다. 책을 보다 엄마 무릎을 베고 잠이 든 아이의 얼굴이 사랑스럽다. 엄마가 읽어 준 그림책을 듣다 잠이 든 아이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그 풍경이 따뜻하다.
서가의 그림책을 둘러본다. 다양한 장르의 그림책을 보다 보면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갈 때도 있고, 그림 감상에 빠져서 시간 가는 것을 잊을 때도 있다. 그리고는 “이 책을 아이들만 읽어?” 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소리 내어 말해 볼 때도 있다. 아이들만 보여주기에는 아쉬운 그림책을 종종 만나다.
사노요코의 그림책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가 그런 책이다. 아이들과 함께 읽을 때는 다섯 살 아이의 어여쁜 동심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혼자만의 시간에 다시 읽어보는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개울가 텃밭이 있는 작은 집에 98세의 할머니는 다섯 살 난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다. 낚시를 가자고 조르는 고양이에게 할머니는 “하지만 나는 98살인걸, 98살 난 할머니에게 그건 어울리지 않아” 말한다. 그렇게 할머니에게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일만 한다. 할머니에게 어울리는 일은 의자에 앉아 졸거나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노년의 삶이 행복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 한 적이 있었다. 우두커니 창밖만 바라보는 ‘하지만 할머니’처럼. 가늘게 뜬 눈에 오동통한 두 볼이 귀여운 할머니는 매사에 의욕이 없다. 2~3가지의 절제된 색과 함께 거친 듯 짧게 이어져 경쾌한 목탄 그림은 할머니의 지루한 생활과 어울려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새 99세 생일날이 되었다. 생일날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다. 드디어 할머니에게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 아침 할머니는 생일 케이크를 만들며 고양이에게 생일 초 99개를 사 올 것을 부탁한다. 잠시 후 고양이는 울면서 집에 들어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양초를 모두 잃어버려 양초가 다섯 개만 남았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케이크에 양초를 꽂고 불을 붙인다. 그런 후 양초를 세어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어머나, 생일 케이크에 꽂힌 양초가 다섯 개네!” 이제 할머니는 다섯 살이 되어 버렸다. 할머니는 이제 다섯 살짜리 할머니가 되었고 고양이와 친구가 된다. 그날도 고양이는 할머니에게 낚시를 가자고 조른다. 머뭇거리는 할머니에게 고양이가 말한다.
“할머니도 한번 해봐요”
“어머 그렇지 나는 다섯 살이었지!”
세월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고 무기력했던 할머니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자신을 깨달은 것이다. 죽음만을 기다렸을 99살에서 겨우 다섯 살이 되었으니 말이다. 드디어 할머니는 99살 늙은이라는 자신의 자의식을 해체하고 다섯 살 아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인생에서 절대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시간의 벽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환희의 순간이다. 그렇게 할머니는 다섯 살이 되어 그동안 도전하고 싶었으나 나이라는 벽 앞에서 좌절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해나간다. 다섯 살이 된 할머니는 흔쾌히 낚시도 하고 나비 같은 걸음으로 개울도 건넌다. 거친 듯 경쾌한 그림 선이 할머니의 날쌘 몸동작을 살려준다. 휘날리는 치맛자락이 새처럼 가볍다. 동글동글 크게 뜬 두 눈은 장난기로 가득하다. 얼굴에 가득 찬 미소는 할머니를 활기찬 다섯 살 아이로 보이게 한다.
나도 나이를 잊고 할머니와 고양이의 손을 잡고 개울가를 경쾌하게 뛰어 건너고 싶다.
나이를 잊은 할머니와 이야기 나누고 싶다.
어느 날 나는 준비되지 않은 실직을 했다.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막막했다.
“아유 내가 이 나이에”
“아무리 100세 시대라지만...”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고민이 많다. 나이는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아무것도 이루어놓은 것이 없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도 한번 해봐요” 내 귓가에 고양이의 외침이 들렸다.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를 다시 펼쳐 든다. 할머니의 동그래진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익살스러운 눈웃음이 행복해 보인다. 99살도 하는데 나도 한번 해볼까? 나도 5살이 되어 볼까?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가 되어가던 나를 뒤돌아보게 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어른에게 용기를 주는 그림책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도서관과 서점에서 그림책은 유아 책으로 분류되어 진열된다.
이렇게 어른에게 용기를 주는 그림책이 있다. 그림책이 담은 세계는 이렇게 독자의 층을 넓혀가고 있다. 담고 있는 주제의 다양해짐은 물론 실험적인 화풍을 선보임으로써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들도 꽤 많다. 하지만 여전히 도서관과 서점에서 그림책은 유아 책으로 분류되어 진열된다. 보통 그림책은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글과 페이지의 분량이며, 내용 대부분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독자들은 그림책이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전 연령대를 아우르기가 가능한 매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림책은 글과 그림으로 표현된 장르이기에 연령대를 고정하지 않아도 된다. 도서분류의 체계의 다양화를 통해 그림책의 영역을 확장하자.
어린이용 책이라는 고정관념을 넘어서서 모두를 위한 책으로써 그림책에 날개를 달아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