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소설 - 엄마 없는 밤
모든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고 소설의 모양새를 한 에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에세이 소설이라는 명칭은 없기에 정식 명칭은 소설입니다. 지명과 인물의 이름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결혼 초반에도 영식은 술과 노름을 좋아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영일이 죽은 뒤로는 그날 번 돈을 노름으로 다 날려 버렸고, 일이 다 끝나지 않아도 술을 마시러 갔다. 바다에서 멸치와 새우를 잡아 오면 삶아서 말리거나 젓갈을 담을 생각은 않고 그냥 던져두고 나갔다. '잡아 오기라도 했으니, 이제부터는 니가 알아서 해라. 썩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라는 심보였다.
순자의 뱃속에는 은진이가 있었다. 임신 6개월의 몸으로 멸치와 새우 200리터 서른 드럼에 젓갈을 담그는 일을 혼자 해야 했다. 8월에 담가야 3개월 발효시켜 11월 김장철에 팔 수 있었다. 먹고살려면 혼자라도 일을 해야 했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순자는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을 견디며 젓갈을 담갔다. 뱃속에 아이가 있었지만 죽으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일을 했다.
"어이구~ 썩을! 내가, 이 노므 집구석이 뭐 얻어먹을 게 있다구 시집을 와 가꾸는 이 고생을 허구 자빠졌는지... 어이구~ 내 팔자야~ 어이구~ 허리야!! 이러다 죽으믄 누가 슬퍼 나 헐라나 모르겄네~ 어이구~ 썩을!!"
영식은 순자가 담아 놓은 젓갈을 11월에 소매업자에게 팔았고 잘 익어 맛이 좋아, 한 드럼에 10만 원이라는 좋은 가격을 받고 팔 수 있었다.
서른 드럼을 다 팔아 300만 원을 받아 들고 영식은 친구들을 불러 기분 좋게 술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 여자들을 끼고 술을 먹던 자리에서는 수표가 팔랑거리며 날아다녔다.
하룻밤 사이 300만 원을 다 날려버린 영식은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영일이 죽은 후 망나니가 되어가는 영식을 순자는 감당할 수 없었다. 심한 입덧으로 앙상하게 말랐던 순자는 몸고생에 맘고생까지 매일 같은 눈물이었다. 뱃속에서 열 달을 엄마와 같이 울다 나온 은진이는 태어나서도 매일 울기만 했고 아무리 달래도 그칠 줄 몰랐다.
순자는 은주를 낳은 이후로 아이를 더 이상 낳고 싶지 않았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하나만 더 낳자는 영식의 간곡한 부탁에 은진이를 낳았다. 막내 민철이가 생겼을 때는 아들 꿈꿨다며 이번엔 진짜 아들이라고 장담하길래 또 낳았다. 그렇게 다섯을 낳아 하나를 잃고 넷을 키웠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좀 정신을 차리려나 기대했건만 영식은 득남주를 내야 한다는 핑계로 더 많은 술을 마시고 다녔다.
영식의 친구들은 아들 하나 없다며 장난스럽게 영식의 흉을 봤었다.
"저눔 새끼는 워째 션찮으믄 아들 하나두 뭇 낳는댜?"
영식이 드디어 아들을 낳았으니 기분 좋게 호구 노릇을 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주를 내느라 바빴고, 술값을 계산하느라 주머니는 날로 가벼워졌다.
어릴 적부터 순자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뭔가 다르게 보였다. 호사스러움은 누리는 그들은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것 같아 부러웠다. 교회에 가보고 싶었지만 혼자 찾아갈 용기는 없었다.
고이도에도 교회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같이 가자는 사람은 없었다. 유란이네 형님이 교회를 다닌다고 했지만, 같이 가자는 소리 한 번도 하지 않는 것이 서운하기도 했다.
영배의 두 번째 부인 연화가 멀쩡한 본처를 밀어내고 고이도에 들어앉아 있으니, 사람들은 보통내기가 아니라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눈 하나 깜짝 않던 연화였지만 동네에 어울릴만한 친구가 하나도 없으니 외로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화가 순자보다 한 살 어렸지만, 손윗사람이라 형님이라 불러야 했다. 연화는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드센 동서들보다 순하고 말수 적었던 순자가 마음에 들었다. 나이도 비슷하니 친구처럼 지내자며 순자에게 스스럼없이 대했다.
피할 수 없는 동서지간이었고 연화의 친화력이 나쁘지만은 않았던 순자도 편하게 대하기로 했다. 순자는 연화를 종호라 불렀고 연화는 순자를 은경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시집온 여자를 부를 때 그 집 첫째 아이의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마을에서 순자는 은경이로 불렸고, 은주는 은경이 동생 또는 영식이네 둘째라 불렸다.
은주는 어릴 적 어른들이 "은경아."라고 부르면 엄마를 부르는지 언니를 부르는지 헷갈리는데 엄마는 용케도 알아듣고 대답하는 것이 신기했었다.
"은경아~ 교회 가자~"
어느 날 대문 밖에서 대뜸 교회를 가자는 연화의 말에 순자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요일 아침이면 대문 밖에서 부르는 연화를 따라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순자는 연화와 더욱 친해졌다.
순자도 옆집 봉룡이 엄마와 영식을 교회에 데리고 갔다. 영식은 의외로 얌전히 교회를 잘 다녔고, 목사 종길을 집으로 초대해 같이 식사할 만큼 친해지기도 했다.
순자는 이참에 영식이 노름을 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
"교회서 집사 직분꺼정 받은 사람이 노름하면 쓰나! 이제 노름 즘 그만 혀!"
"시끄러!! 내가 알어서 헐 텡깨 잔소리 말어!"
"그눔에 노름을 언제꺼정 헐라구 그려? 이? 새끼들이랑 살라믄 돈이라두 모으구 그려야지 맨날 노름헌다구 다 날리믄 새끼들은 워떻게 살라구 그런댜?"
"시끄럽다구 혔다! 입 다물어!"
"이제 정신 즘 차리구 살으야 헐 거 아녀~ 집사라는 사람이 부끄럽지두 않어?"
"이런... 써글 노무 여편네가 워따 대구 자꾸 잔소리여! 그려! 그러믄 노름하는 집사는 집사 안 허믄 되겄네!"
노름을 끊으라는 순자의 말에 영식은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영식이 죽던 날 순자는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영식만 보였다.
병원에서 사망 판정을 받고 영안실에서 영식의 옆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영안실에는 순자와 영식 둘 뿐이었다. 영식은 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얼굴을 만져보고 손도 잡아 보았지만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순자는 영식의 손을 어루만지며 힘없는 목소리로 두서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장이 그물 쳐놨는디 그거 나 혼저 어쩌라구 그려... 일어나 봐... 가서 그물 걷어 와야 헐 거 아녀... 어이구~ 이렇게 일찍 갈 거믄서 뭐 헐라구 새끼를 넷이나 나놨댜... 나더러 새끼들 다 워찌 키우라구 그런댜... 어이구~ 죽을 줄 알었으믄서 왜 술을 처먹구 배를 몰구 그렸어! 그 노므 술이 웬수네!!
나는 인제 워찌 산댜... 이렇게 대책 읎이 가믄... 나는 워쩌라구 그려~
진짜 죽은겨? 그짓말 아니지? 이렇게 멀쩡헌디... 왜 죽었다구 그런댜?
나는 안 믿깅깨 어여 일어나!! 나더러 워쩌라구 그려!! 새끼들은 워쩌라구!!
그렇게 숙을 썩이드만... 갈 때꺼정 이렇게 숙을 썩이구 가네!!
잔소리헌다구 승질 즘 부려 봐!! 왜 케 조용혀?? 왜 케 조용허냐구~ 뭐라구 말 즘 혀봐!!
여태꺼정 나헌티 뭇 헌거 미안두 안 혀? 그렁깨 살았을 때 즘 잘 혀 주지... 집이 가야지... 언제꺼정 병원이 있을라 그려... 아! 얼릉 일어나 봐!! 일어나 보라구!!
어이구~ 어이구~ 나는 워쩌라구 그런댜... 나는 인제 혼저서 워쩐댜..." 순자는 영안실에 앉아 한참 넋두리 같은 작별 인사를 했다. 영식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지친 순자는 밤이 늦어서야 영식을 데리고 고이도로 돌아갔다.
장례를 어떻게 치렀는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아이들이 언제 오고 갔는지, 뭘 먹고 어떻게 잤는지 신경 쓸 정신도 없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울다 지치고 또 울다 지쳤던 시간의 반복이었다.
영식을 산에 묻고 사람들은 빈 상여를 메고 돌아갔다. 이제 순자도 집으로 가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자신도 혼자가 됐으면서 남편을 산에 혼자 두고 가려니 외로울 것 같아 마음이 아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빽빽한 소나무들 사이로 진달래꽃이 피어 있었다. 진달래를 한 움큼 꺾어 들고 와 영식의 무덤 앞에 내려놓고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외로워두... 혼저 쫌만 있어! 내가 힘들어두... 애들 다 키워놓구 올 텡깨..." 다시 오겠다는 말을 하며 목이 메어왔다.
순자는 은경과 은주를 데리고 맥없이 더벅거리며 산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