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상한 목공방 2]
소설 [이상한 목공방 2]
금요일 저녁. 퇴근 후 남편과 동네 식당에서 곰장어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며칠째 공사 중이던 빈 상가는 24시 무인 빵집이 되었다. 문 앞에 쓰인 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딸깍, 스르륵' 자동문이 열린다. 진열대 위에 다 팔리고 몇 개 남은 빵들 중 아침으로 먹을 빵 두 개를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 앞 골목 입구에 들어섰을 때 회색 페르시안 고양이가 치킨집 데크에서 사뿐히 뛰어내린다. 그레이스였다. "그레이스!"하고 불렀더니 녀석이 주차된 차 밑으로 얼른 숨는다. 쪼그리고 앉아 차 밑으로 얼굴을 내밀며 다시 녀석을 불러 보았다.
"그레이스! 그레이스! 엄마야! 얼른 나와 봐!"
그제야 나를 알아본 녀석이 차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야옹거리며 나를 반긴다.
"냐~ 앙~"
"그레이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치킨 얻어먹고 나왔어?"
"냐~ 앙~"
집 앞 맥XX 치킨의 여사장은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매일 치킨을 나눠주는 인심 좋은 사람이다. 덕분에 배고픈 길고양이들은 저녁마다 치킨집으로 모여들어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간다.
언제부턴가 남편은 집 앞 길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아야! 오늘 몇 시에 퇴근해?"
"왜? 오늘은 8시쯤 퇴근할 건데?"
"그래? 그러면, 퇴근해서 집 앞 고양이들한테 사료 좀 챙겨 주면 안 될까?"
"왜? 오늘 늦어?"
"응. 야근인데. 밤샐 것 같네."
"야근인데 마누라는 안 챙기고 고양이들만 챙기는 거야? 그리고,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길고양이들을 챙겼다 그래?"
"걔네 내가 밥 챙겨준 지 꽤 됐거든! 꼭 저녁에 와서 밥 달라고 기다리는 놈들이 있어. 밥 안 챙겨 주면, 걔네 오늘 굶잖아."
굶는다니 귀찮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래? 고정 멤버가 생겼어?"
"응. 세 마리. 집에 들어가서 사료랑 물 가져다가 가득 채워주기만 하면 되거든."
"알았어. 밥그릇 어디다 놨는데?"
집 앞 주차장 한쪽 구석에 놓인 그릇은 이미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물그릇에 생수를 부어주고 밥그릇에 사료를 가득 부었다. 남편의 의외의 오지랖으로 집 앞 고양이들까지 밥을 챙기기 시작하면서 녀석들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집 앞 간이 급식소를 찾는 손님은 대장이와 그레이스, 그리고 쿠로다. 비쩍 마른 검은색 수컷 고양이 쿠로는 허피스와 구내염을 앓고 있었고, 흰 털에 검은색 얼룩무늬 젖소 수컷 고양이 대장이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이 동네 대장이다. 대장이의 보호를 받으며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암컷 회색 페르시안 고양이는 그레이스다. 녀석들의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모른다. 치킨집 사장이 그리 부르길래 우리도 그리 부르기로 했다. 대장이와 그레이스는 항상 함께 다닌다. 둘은 쿠로와 친하지는 않아도 서로 싸우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얌전히 밥을 먹는다.
날이 갈수록 말라가는 쿠로가 급식소를 결석하는 날이 잦아졌다. 녀석이 보이지 않을 때면 혹시 죽은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집과 공방에서 돌보는 녀석들이 한 두 마리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치료하거나 돌봐줄 형편은 못 된다. 아픈 쿠로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한가득이다.
띄엄띄엄 급식소를 찾던 쿠로는 어느 날부턴가 아예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길에서 사라지는 길고양이들이 쿠로만은 아니다. 안타깝지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쿠로의 빈자리는 다른 녀석이 차지했다. 새로운 손님은 수컷 검은 고양이 코점이다. 쿠로처럼 온몸이 검은데 주둥이만 하얗고 딱 코에 검은 무늬가 있어 코점이라고 불렀다. 수컷인 코점이는 대장이와 마주칠 때마다 싸울 기세다. 그레이스는 유독 코점이를 무서워했다. 대장이는 코점이를 경계하며 살벌한 경고의 눈빛을 날린다. 그레이스는 대장이 뒤로 얼른 숨는다. 싸우는 것은 싫지만 그레이스를 지켜주려는 대장이의 씩씩함은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고양이들 사이에서 서열 정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참견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도 먼저 친해진 놈에게 마음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나 보다.
"너희들 또 싸우지! 싸우지 말고, 밥이나 빨리 먹어! 야! 코점이!!! 너! 밥이라도 얻어먹고 싶으면 대장이 한데 덤비지 말고, 얌전히 먹고 가라!"
며칠이 지나고 서열 정리가 끝난 모양이다. 코점이는 대장이와 마주치면 꼬리를 내리고 슬그머니 한쪽 구석으로 비켜선다. 오래 싸우지 않아서 다행이다. 세 녀석 모두 편히 먹을 수 있도록 각자의 물과 사료를 따로 담아 거리를 두고 급식을 했다.
그레이스는 특별히 SUV 트렁크에서 밥을 먹는다. 녀석은 나만 보면 졸졸 따라다닌다. 말은 또 어찌나 많은지 밥을 줄 때까지 계속 재촉을 한다. 차 트렁크를 열면 성질 급한 녀석이 트렁크 안으로 폴짝 뛰어오르니 자연스럽게 트렁크가 그레이스의 밥자리가 되었다. 종일 배가 고팠던 그레이스는 160g 캔 한 통을 순식간에 뚝딱 해치운다.
어느 날부터인가 대장이와 코점이도 보이질 않는다. 며칠째 그레이스 혼자다. 대장이와 코점이는 왜 보이지 않는 걸까? 어둠이 깔린 컴컴한 저녁. 퇴근하고 골목으로 들어서는 차를 알아보고 그레이스가 멀리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온다. 혹시 차에 치이기라도 할까 봐 운전이 조심스럽다. 다행히 녀석은 차 가까이는 오지 않고 옆에서 기다린다. 도대체 차를 어떻게 알아보는 걸까? 멀리서부터 반갑게 뛰어오는 녀석을 보면 한없이 사랑스럽고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하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저리 반길까. 그레이스는 종일 굶다가 오후 늦게 치킨집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내가 퇴근하고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라 기다린다. 밤이 다 되어서야 점심을 먹는 셈이니 먹을 때마다 폭식이다. 녀석은 유기묘다. 집에서 살다 버려진 고양이들은 길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먹을 것을 구할 줄도 모르고 사냥하는 법도 모른다. 겨우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구걸뿐인데 그것도 넉살이 좋아야 가능하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그레이스가 구걸하는 집은 치킨집과 우리 집 딱 두 집뿐이다. 그러니 종일 얼마나 배가 고프겠는가.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면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퇴근 후 집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평소 같으면 그레이스가 기다리고 있을 시간인데 오늘은 불러도 대답이 없다. 골목을 빠져나와 치킨집 앞으로 향했다. 치킨집 데크 위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그레이스에게 캔을 주려 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밥을 얻어먹는 녀석이 아닌데... 웬일일까? 그레이스를 불렀다.
"그레이스! 거기서 뭐 해?"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살짝 눈인사를 했다. 그레이스가 나를 보고 데크에서 뛰어 내려와 반가움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녀석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레이스! 너 할아버지한테 캔 얻어먹으려고 했어? 으이그!! 이리 와! 얼른 가서 밥 먹게!"
녀석을 데리고 집으로 가려는데 할아버지의 혼잣말이 귀에 쏙 들어와 박힌다.
"그래도, 잘 얻어먹고 다니네..."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70이 넘어 보이는 마르고 왜소한 체격의 노인. 미간의 주름이 유독 선명하다. 길고양이에게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할 만한 성격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대체 그레이스와 무슨 사이길래 캔을 주고 저런 말까지 하는 걸까? 왠지 모를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할아버지는 데크 의자에서 조용히 일어나 반대편 골목으로 걸었다.
"뭐지? 저 할아버지는 왜 저런 말을 하지?"
"그레이스! 너 저 할아버지 알아?"
"냥!"
"몰라?"
"냥!"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냥!"
"대답은 잘하는데, 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네? 고양이 번역기라도 써야 되나? 야! 그래도, 아무한테나 가면 안 돼! 위험하니까 모르는 사람한테 절대 가지 마! 알겠어?"
"냥!"
그레이스는 앞서 걸으며 빨리 오라고 재촉이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집 앞 주차장으로 향했다.
늦가을 저녁 바람이 벌써 쌀쌀하다. 올겨울에는 최강 한파가 몰려올 거라고 뉴스에서는 연일 기상이변에 대해 떠들어 댄다. 대장이와 코점이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여전히 그레이스는 혼자다. 계속 보이지 않는 녀석들도 걱정이지만 추운 겨울을 혼자 보낼 그레이스도 걱정이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날이다. 그레이스를 찾아 치킨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치킨집 안에서 손님에게 쫓겨나는 그레이스를 보았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쫓겨난 모양이다. 불쌍한 녀석. 길고양이가 환대받지 못하는 것은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만 괜히 내가 더 기분이 나쁘다. 일부러 야박하게 쫓아낼 건 또 뭐람. 구걸해서 먹고살기도 힘든데 앞으로 닥칠 추위는 또 어쩌란 말인가.
그레이스는 털이 긴 페르시안 종으로 보이지만 회색 털을 가진 페르시안 종이 있던가? 아마도 페르시안 믹스 종인 모양이다. 뛰어난 미모를 지닌 녀석이니 어쩌면 입양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인스타그램에 입양 홍보 영상을 찍어 올리기 시작했다. 영상을 올리기 시작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였다. 임시 보호를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사 가면서 연락이 끊겼던 동갑내기 수강생이 최근에 인스타그램을 하기 시작했다. 동갑내기 옛 수강생은 그레이스 홍보 영상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그레이스의 임시 보호자를 자청한 것이다. 고민이었다. 임시 보호는 입양될 때까지 잠시 보호하는 것이지 입양은 아니다. 그녀의 가족들은 알레르기가 많다. 예쁘고 귀엽다고 무턱대고 입양했다가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생기면서 파양 되는 고양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함부로 입양하겠다는 말은 못 하고 임시 보호를 하겠다는 것이다. 임시 보호를 하다가 알레르기가 생기지 않으면 입양하겠다고 말했지만, 만약 가족 중 누구 하나라도 알레르기가 생긴다면 다른 입양처를 알아보거나 또다시 길에 버려지는 상황이 생길까 봐 아찔하다. 그녀는 한 달을 고민했고 결심이 서자 온 가족의 알레르기 검사를 했다. 그녀는 신중하고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다. 목공 수업을 들을 때도 뭐든 천천히 꼼꼼하게 만들고, 전문가도 어려운 스크롤쏘 작업을 두 번째 수업 만에 오차 없이 잘라내던 섬세함을 지닌 사람이다. 사람은 좋은데, 그놈에 알레르기가 문제다.
요즘 들어 동네 고양이들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 누군가 잡아다 고양이 탕용으로 판다는 소문이 있고, 약을 뿌려 죽인다는 소문도 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 치부할 수 없는 것이 벌써 쿠로와 코점이와 대장이까지 모두 사라지지 않았던가. 산책을 나가보면 동네 고양이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고양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겁 많은 그레이스는 사람을 가리고 몸을 사린 덕분에 아직 살아남은 것일까? 소문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그레이스도 위험해질 것은 뻔하다. 거기다 대장이도 없이 홀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야 한다.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인스타 친구들에게 그레이스의 상황과 나의 고민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사람들은 임시 보호라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일단 구조라도 해야 살길이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들의 의견을 따라 동갑내기 옛 수강생 집에 임시 보호를 맡기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 오늘은 그레이스를 구조하기로 한 날이다. 일찍 퇴근한 남편과 함께 이동장을 준비해 집으로 향했다. 그레이스는 아직 치킨집에 있는 모양이다. 골목을 걸어 치킨집 앞으로 갔다.
"그레이스~ 어디 있어? 그레이스~~"
치킨집 옆 골목에 숨어있던 그레이스가 목소리를 알아듣고 뛰어나와 반긴다.
"냐~~~~ 앙~"
"아이고~ 우리 그레이스 거기 있었어? 배고프지? 얼른 밥 먹으러 가자!"
"냐~~~~ 앙~"
평소처럼 그레이스와 골목을 걸었다. 밥을 먹을 생각에서인지 녀석의 발걸음이 가볍다. 치킨집에서 집 앞 주차장까지는 불과 몇 미터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다. 그 짧은 거리를 걸으며 만감이 교차한다.
오늘은 녀석과의 마지막 밤이다. 빨리 오라며 재촉하는 녀석의 걸걸한 목소리가 그리워질 것만 같다. 골목을 함께 걷는 이 순간이 그림처럼 기억 속에 작은 픽셀 단위로 촘촘히 새겨지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정이 많이 들었는데... 입양 간 다른 녀석들처럼 너도 이제 못 보겠구나! 추위라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 잘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좋은 사람이니까. 많이 예뻐해 줄 거야.'
남편은 차 트렁크를 열고 이동장을 꺼내 포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차 트렁크로 뛰어올랐을 때 나는 녀석을 번쩍 안아 올렸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순순히 안겨있다. 남편이 이동장 지퍼를 열자, 안고 있던 그레이스를 이동장 안으로 쑥 집어넣고 재빨리 지퍼를 닫았다.
"됐다!!"
남편은 너무 허무하게 잡힌 것이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뭐야. 끝이야? 뭐가 이렇게 싱거워?"
"그러게? 워낙 순한 놈이라. 너무 쉽게 잡혔는데?"
"3초도 안 걸렸어."
"쉽게 잡혀주면 나야 고맙지, 뭐!"
"너는 믿었으니까 그런 거겠지?"
"그런 거겠지!"
그레이스를 집으로 데려가 작은 방에 풀어놓으니, 구석을 찾아 숨느라 바쁘다. 베니는 새로운 놈이 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밤새 울어대고, 베키는 구석으로 숨어 나올 생각도 않고, 마이콜은 그레이스가 뚫어질 때까지 레이저를 쏘아댄다. 얼마 전 들에서 구조해 입양을 기다리고 있는 천방지축 새끼 고양이 덕순이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 그레이스에게 덤빈다. 그레이스는 이동장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이동장 안으로 들어가 나올 생각을 않는다. 겁을 잔뜩 집어먹고 대소변을 참아가며 밥도 먹지 않는다.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그레이스를 데리고 공방으로 출근하기 전 치킨집에 들렀다.
"사장님! 그레이스 입양 가요. 지금은 임시 보호긴 한데 잘되면 그 집에서 입양할 수도 있고, 안되면 다른 집에라도 입양시켜 보려고요."
"그래요? 아우! 잘됐네! 안 그래도 그레이스 계속 혼자 다녀서 걱정했는데. 정말 잘됐네요."
"그레이스! 사장님한테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하고 인사드려야지!"
"......"
평소 같으면 야옹거리며 대답했을 녀석인데 긴장한 탓인지 한마디 대꾸도 없다. 치킨집 사장은 이동장 안으로 손을 넣어 그레이스를 쓰다듬었다.
"그레이스! 잘 가! 그동안 고생했어. 가서 사랑받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따뜻한 집에서 편안하게 잘 살아."
"좋은 곳으로 가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래요. 잘됐어요. 그레이스 주인 할아버지 오시면 입양 갔다고 전해줄게요."
"그레이스 주인이요?"
"아! 모르셨구나! 이 근처에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인데. 그분이 몸이 좀 안 좋아요. 집에서 키우다가 그레이스가 발정 나서 밖으로 나갔는데. 할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시니까 그냥 돌아다니게 내버려 두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길고양이가 된 거죠. 가끔 오셔서 캔 사다가 먹이고 그러시길래 물어봤더니 "우리 집 고양이야!"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그때 알았죠."
"그러면 혹시, 그 주인이라는 할아버지가 저번에 여기 가게 앞에서 캔 사다가 먹이려고 했던 빼빼 마르고 왜소한 그분인가요?"
"그 할아버지 요즘도 가끔 오셔서 캔 사다가 주시니까 아마 맞을 거예요. 예전에는 자주 오셨었는데. 요즘은 많이 아프신가 자주 못 오시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모르는 사람한테 얻어먹은 게 아니었네! 그래서 그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던 거구나! 그래도 그렇지, 그 할아버지 좀 무책임하시네. 못 키울 거 같으면 다른 집에라도 입양을 보내든가 하시지. 왜 집고양이를 길에서 살게 방치하고 그러지? 굶어 죽으면 어떻게 하라고?"
"그러게요. 아무튼 잘됐어요. 그레이스는 복도 많네! 길에서 지내던 다 큰 놈이 입양도 가고."
"오늘 그 집으로 가는데. 사장님한테 인사해야 할 것 같아서 들렀어요."
"에구~ 간다니까 섭섭하네! 많이 예뻐했는데..."
"저도 맨날 밥 달라고 앵~ 앵~ 거리면서 따라다니는 게 너무 귀여웠는데. 이제 못 볼 테니 섭섭하네요."
치킨집 사장은 그레이스와 눈을 맞추고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그레이스. 잘 가! 행복하게 잘 살아!"
공방에 도착했다. 고양이들을 전부 내보내고 이동장을 열어 조용히 혼자 두었더니 그제야 슬그머니 나와 밤새 참았던 소변을 본다.
그레이스를 걱정하던 동갑내기 옛 수강생은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초보 집사답지 않게 대범하게 안아 올리는 그녀의 손길에서 왠지 모를 든든함이 느껴졌다.
"그레이스. 잘 가! 잘 살아야 해! 엄마는 찾지 말고, 새 가족이랑 오순도순 잘 살아!"
동갑내기 옛 수강생은 그레이스의 안정을 위해 바로 집으로 출발했다. 공방 앞마당에 서서 멀어져 가는 차를 바라보았다. 뺨 위로 눈물 한 방울이 쪼르르 흘러내렸다.
"에이 씨. 나는 또 왜 눈물 바람이지?"
눈물을 쓱 닦아내고 공방으로 들어와 조용한 음악을 틀고 한쪽 구석에 치워 두었던 목조각 나무와 조각도를 꺼내 들었다. 마음이 심란할 때는 우드 카빙이 최고다.
동갑내기 옛 수강생은 첫날부터 녀석의 목욕을 시키고 발톱까지 깎았다. 순한 녀석이지만 익숙지 않은 사람이니 몸부림치거나 할퀴었을지도 모른다. 고양이를 처음 다뤄보는 사람이 목욕에 발톱까지 깎다니. 그녀도 보통내기는 아닌 모양이다. 며칠 안정을 취한 뒤 병원에 데려가 건강검진을 마치고, 몇 년 묵어 엉겨 붙은 털을 모두 밀고, 예방접종을 마쳤다. 약간의 방광염과 치아 상태가 조금 고르지 못한 것을 빼고는 길에서 지낸 고양이답지 않게 그레이스는 너무도 건강했다. 그동안 아무거나 주워 먹지 않고 돌봐주는 사람에게서만 밥을 얻어먹은 덕분이었다. 그런 놈이 길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복이다.
동갑내기 옛 수강생이 겨울방학을 맞아 두 딸을 데리고 먼 거리를 운전해 목공 수업을 왔다. 이번에는 본인 수업이 아닌 아이들의 체험학습이었다. 수업은 다섯 번에 걸쳐 진행하기로 했다.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을 진행해 본 경험이 있어 수업 계획은 어렵지 않았으나,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목공 수업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다 보니 목공이라기보다는 나무를 활용한 미술 수업에 가깝다.
첫째 딸은 고등학교 2학년이고 둘째 딸은 초등학교 5학년이다. 둘째 딸은 조용하고 똑 부러지는 것이 엄마를 닮았다.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 작업도 즐긴다. 첫째 딸은 지적장애가 있다. 손이 야무지지 못한 딸을 위해 그녀는 옆에 바짝 붙어 일일이 작업을 돕는다.
그녀가 처음 목공 수업을 들을 때가 기억난다. 관심사가 비슷하고 정치 성향도 일치하니 작업하는 내내 수다를 떨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녀도 목공 수업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웃고 떠드는데도 그녀의 눈에서는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가슴에 가득 품고 있지만 배출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강인해 보이면서도 왠지 모를 안쓰러움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오늘 첫째 딸을 돌보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왜 그리 슬픈 눈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자신의 것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목공 수업도 그 과정 중 하나였다. 2년 만에 다시 만난 그녀는 예전보다 밝고 명랑해 보였다. 그리고 글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직은 작가 지망생이고 등단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했다. 그녀의 슬픈 현실은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은 힘이 넘쳤다. 나는 그녀를 새로운 걸음을 응원해 주었다.
그레이스가 그녀 집으로 간 지 3개월이 지났다. 알레르기는 생기지 않았고, 그녀의 가족들은 그레이스를 입양하기로 했다.
이제 그레이스와 그들이 가족이 된 지 벌써 1년이다. 그들은 그레이스를 그레이라고 부른다. 그레이는 가족 모두를 사랑하지만, 특별히 엄마와 둘째 언니를 더욱 사랑한다. 매일 밤 곁에서 잠들고 어딜 가든 졸졸 따라다닌다. 겁 많고 경계심 많던 녀석은 그새 장난꾸러기가 되었다. 집안 구석구석 스크래쳐로도 모자라 천연덕스럽게 거실 카펫 위에서 엉덩이 힘 빡 주고 발톱을 한껏 세워 야무지게 실을 뜯어내며 하루를 시작한다. 해가 뜨기도 전에 엄마를 깨워 아침밥을 먹고, 따뜻한 전기방석이 깔린 쿠션 위에 뒤집어져 등을 지진다. 햇살 가득한 거실 베란다에서 실눈이 되어 일광욕을 즐기고, 널따란 캣타워를 두고 아빠 의자를 차지하고 누워 침 흘리며 낮잠을 잔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언니들과 한바탕 잡기 놀이를 하고 공놀이도 한다. 유기묘 그레이스는 이제 편식까지 하는 집고양이 그레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