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랑캐

소설 - 바다 별

by 온벼리

"바다 별"이 새로 쓰여 "엄마 없는 밤"이 되었습니다.

바다별은 지우려다 그냥 둡니다. 좀 더 다듬어진 글을 보고 싶으시면 브런치북 "엄마 없는 밤"을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브런치북] 엄마 없는 밤 (brunch.co.kr)


소설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자전적인 에세이 이기도 합니다. 처음 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힘들고 아파서 소설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소설의 매력에 빠지게 되네요. 소설의 형태를 빌어 약간의 조미료가 들어갔을 뿐 실화이고 제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명과 인물의 이름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나는 오랑캐

영식과 순자는 오목이나 바둑을 두며 오락을 빙자한 겨루기를 자주 했다. 영식은 가족들에게 자신의 우월함을 인정받고 싶어했다. 영식은 이길 때면 이마에 승리의 딱밤을 가차 없이 날리며 통쾌해했지만 지고 나면 바둑판을 업어 버리고 딱밤을 때리려는 순자의 손목을 붙잡고 낄낄대며 씨름을 했다. 그깟 딱밤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패배를 인정하기 싫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오목이나 바둑으로 지능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승리로 따라오는 우월함에 대한 인정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순자에게 자꾸 지는 것이 아닌가. 영식의 바람과 다르게 승률이 높았던 순자가 지능이 더 높다는 암묵적인 결론이 내려졌다. 순자도 그런 상황을 은근히 즐겼다.


은주는 영식을 닮았고 은경은 순자를 닮았다. 영식은 오목에 관심을 보이는 은주의 선생을 자처했다. 자기를 닮아서 이해가 빠르고 똑똑하니 자기가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찍부터 오목을 배운 은주는 반 친구들과의 오목대회에서 매번 일등을 했다. 영식은 자신을 닮은 은주의 똘똘함이 흐뭇했고 은주와 첫째 은경의 오목 대결에서도 은주가 승리를 하자 묘한 대리만족을 느꼈다. 역시 자신의 유전자가 순자의 유전자보다 우월하다는 듯이 말이다.


은주의 언니 은경은 은주보다 두 살이 많지만 생일이 빠르다는 이유로 학교를 조기 입학해 은주와 3학년 차이가 났다.

은경은 한 살 어린 사촌동생 유란이 집으로 자주 놀러 다녔다. 유란은 예쁘장했지만 앙칼지고 되바라져 은경을 할퀴거나 꼬집어 피가 나고 멍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영식은 동생이랑 놀면서 맨날 당하고 온다고 타박을 했다. 은경은 공부에 관심도 없고 성적도 좋지 않았는데 결정적으로 아이큐 검사까지 낮게 나왔다. 영식은 심부름도 똑 부러지게 해내지 못한다고 아예 시키지 않겠다며 대단한 벌이라도 주는 양 선언했다. 그 피해는 은주에게 돌아갔다. 사소한 심부름도 모두 은주의 몫이 된 것이다.

"어이구... 문난 지지배... 누굴 닮아서 저 모양인지..."

순자 너를 닮아서 애가 이모양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은경의 이름이 문난 지지배라도 되는 듯 영식은 은경을 타박할 때마다 빼먹지 않고 그리 불렀다.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꾸지람에 은경은 영식과 되도록 마주 치치 않으려 애썼고 어쩌다 영식 앞에 서게 되면 주눅 들어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은경은 은주에게 화풀이를 했다. 마치 빌려준 이잣돈을 받으러 온 사채업자 같이 굴었다.

은경은 은주에게 별명을 지어 주겠다고 자청했다. 이름에 주자가 들었으니 ‘주댕이’라고 부르자고 했다. 은경이 말하는 주댕이는 입을 가리키는 속된 말로 '저놈에 주댕이'라는 의미였다. 별명을 빙자한 돌려 까기였다. 은주가 기분 나빠하자 선심이라도 쓰는 듯 ‘이’자는 빼고 ‘주댕’이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은주의 기분이 나쁘든 말든 은경은 "야~ 주댕"이라고 부르며 만족스러워했다.


유란이 집으로 놀러 오면 은주도 놀이에 끼워 주었다. 모든 주도권을 가진 유란이가 의견을 말하면 은경은 은주에게 지시를 했다.

유란이 작은방에서 연극놀이를 하자고 했다. 은주는 할머니, 은경은 할아버지, 해설은 유란이다.

"야 주댕. 할머니는 뚱뚱하니까 너 이거 다 입어."

은경은 서랍을 열고 옷을 한 무더기 끄집어냈다. 은경과 유란은 위아래로 겹겹이 껴 입으며 점점 우스워지는 은주의 꼴을 보며 키득거렸다. 점점 빡빡해져 더 이상 껴 입기도 힘들어지자 땀이 나고 팔다리도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이야기는 할아버지가 요강 안에 들어가 쉬고 있는데 덩치 크고 뚱뚱한 할머니가 요강에 앉아 방귀를 뀌니 "어? 천둥이 치네?" 소변을 보니 "어? 비가 오네?"라고 하는 장면이었다.

작은 2인용 나무상을 뒤집어 요강을 대신하기로 했다. 은경이 요강에 들아가서 쪼그리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은경은 불편한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역할을 바꿔야겠다고 주장했다.

"야. 주댕... 니가 할아버지 해."

"아~ 왜!! 할머니 하래서 옷도 이렇게 다 껴입었잖아!"

"니가 쪼그맣잖아... 내가 저 좁은 데를 어떻게 들어가냐~ "

은주는 껴입었던 옷을 벗느라 또 한참을 낑낑거렸다. 역할을 바꾸고 시키는 대로 뒤집힌 상 위 들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야 고개도 숙여~ 완전히 숙이고 웅크리구 들어가야지."

공벌레처럼 다리를 잡고 몸을 말았다. 마르고 작은 체구였지만 공벌레가 되어 상다리 사이에 끼여 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은 뻐근하고 쪼그린 몸은 숨쉬기도 불편했다. 은경은 은주 위에 걸터앉아 할머니 역할을 하며 입으로 방귀 소리를 내고 소변 누는 소리도 냈다. 유란과 은경은 방귀 소리가 우습다는 듯 자꾸 낄낄거렸다.

"야 주댕. 니가 할아버지 대사 할 차례잖아!"

"아... 아... 야... 무거워... 나 너무 힘들어."

"야 주댕. 어? 천둥이 치네~라고 하라고!"

"너무 무겁고 힘들어서 못하겠어! 일어나! 무거워~ 비키라고~ 나 그만할 거야!"

"야~ 이 미친 새끼야~ 그렇다고 일어나면 어떻게 해. 너 땜에 연극 다 망쳤잖아."

"힘들다고!! 안 할 거라고!"

"그럼 너랑 안논다~"

"안 놀 거야! 힘들어서 못하겠어!"

"야 이 개새끼야!! 뒤질래?"

땀을 뻘뻘 흘리며 일어나 깊은숨을 들이쉬는 은주를 향해 은경은 힘껏 발길질을 했다. 은경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거나 반항을 하면 으레 발길질로 응징을 했다.

은주는 은경이 밀어붙이는 힘 공세에 당해낼 제간이 없었다. 죽을힘을 다해 덤벼 보지만 은경의 엄청난 발길질을 견디다 못해 결국 울음이 터져서야 싸움은 끝이 났다. 그냥 빨리 꼬리는 내리고 도망가든지 엄마에게 이르면 끝날 것을 융통성 없는 은주는 은경에게 사과라도 받으려는 듯 맞서다 결국엔 흠신 두들겨 맞는 꼴이 되고 말았다.

"으아~~~ 으아~~~ 엄마~~~"

은경은 충분한 응징에 속이 후련했고 혀를 내밀며 줄행랑을 치는 여유도 부렸다.

"왜 그려. 왜 또 싸우구 그려?"

"아냐 엄마. 지가 승질 나서 괜히 그러는 거여."

요란한 은주의 울음소리에 순자는 은경에게 묻지만 은경은 벌써 저 멀리 마당으로 도망가면서 멀찍이서 거짓말을 대충 얼버무리고 유란과 대문 밖으로 잽싸게 도망을 쳤다. 오래 설명했다가는 금세 탄로 날것이 뻔했기 때문에 얼른 도망치는 것이 유리했다. 그렇게 도망쳐 저녁때가 되어 들어오면 이미 상황은 종료된 지 오래다. 도망가는 은경의 뒤통수에 대고 은주는 분노의 발악을 했다.

"으아~~~ 엄마~~~ 저 개새끼가~~ 으아~~~"

"왜 그려!! 왜 또 싸우구 그려!!"

"으악~~~ 저 새끼가 으악~~~ 야 이 씨발놈아~~~ 이 개새끼야~~"

은주는 자신이 알고 있는 욕을 목청껏 퍼붓는다. 악쓰며 욕만 하는 은주를 보며 순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은주에게 욕을 가르쳐 준 것은 은경이었다.

"야 주댕 너는 욕 할 줄두 모르냐? 개 새 끼 해봐."

"싫어. 나 욕 안 할 거거든."

"야 이 새끼야. 욕두 할 줄 알어야 되는 거야. 개 새 끼 해보라구~"

은주는 은경에게 개새끼와 씨발놈을 배웠다. 평소에 쓰지 않다가 은경에게 당하고 치밀어 오르면 욕이 튀어나왔다. 욕이란 이렇게 억울하고 화가 치미는데 말은 통하지 않는 상황에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눈에서 불을 뿜으며 욕을 해대는 은주를 보며 오랑캐라고 했다.

"어이구... 저 오랑캐 같은 눔에 새끼... 뭔 욕을 저렇게 헌다니... 어이구... 미치구 환장 허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은경이 그린 그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은경은 자신이 가르쳐준 욕을 자신이 듣는 꼴은 되었지만 두들겨 패고 도망가는 입장에서 은주가 울면 집에 돌아왔을 때 혼날게 뻔하니 욕이라도 가르쳐서 순자의 화를 돋우면 은주가 더 혼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었다. 그러고 보면 은경도 못된 쪽으로는 꽤 머리가 잘 돌아갔다. 은주의 말을 제대로 들어 보지도 않고 오랑캐라고 말하는 순자도 한통속이라고 은주는 생각했다.


언니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

순자는 은경에게 여객선을 타고 은주와 어항에 사는 큰엄마 댁에 심부름을 다녀오라고 시켰다. 은경은 열한 살 은주는 아홉 살이었다. 섬에는 매표소가 따로 없어 배에 승선한 다음 표를 끊어주고 내릴 때 확인 차원에서 다시 표를 수거했다.


허리에 잔돈 주머니를 찬 아저씨는 한 손에 표 뭉치를 들고 다른 손에는 빨간 볼펜을 들고 선실로 들어섰다. 돈을 받아 표에 금액을 적고 점선을 따라 뜯어 잔돈과 함께 줬다. 은경은 주머니에서 엄마가 준 돈을 꺼내보고 잠시 뭔가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은주에게 나지막이 속삭이며 돈을 보여줬다.

"야. 주댕. 엄마가 돈을 삼천 원 밖에 안 줬거든. 학생 요금이 천오백 원인데 갔다가 다시 오려면 한 사람이 삼천 원은 있어야 되잖아? 그럼 너랑 나랑 같이하면 육천 원이 있어야 되거든? 근데 왜 엄마는 삼천 원 밖에 안 줬지? 야... 이거... 내 표 끊고 나면 돈이 없어. 나머지 천오백 원은 들어올 때 써야 되니까. 니건 니가 알아서 해라~"

은경은 슬며시 은주의 눈치를 보더니 자기 친구들 무리로 쪼르르 가버렸다.

'어쩌라는 거지? 내 표값은 없다고? 그냥 가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지?'

은주는 눈앞이 캄캄했다.

은경은 남인 양 아예 은주 근처에는 오지도 않았다. 자기 표 값은 있으니 네가 어찌 되든 내 알바 아니라는 것이었다. 은주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일단 선실 방바닥에 누워 자는 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모르고 지나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쪼그리고 누워 자는 척을 했다. 눈은 질끈 감았지만 주변의 소리는 더욱 생생하게 들렸고 표 끊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저씨는 익숙하게 잠자는 사람들까지 깨워 표를 끊었다.

"표 끓으러 왔습니다. 주무시는 분들 어서 일어나세요."

"어디서 타셨어요? 네! 고이도. 표 여기 있습니다. 응 학생은 어디서 탔어? 응! 거스름돈 오백 원."

모두 손에 돈을 들고 자신의 차례가 되기를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도 자고 있는 은주를 발견한 아저씨는 이제 콕 집어서 은주를 불렀다.

"거기 자구 있는 학생! 일어나!! 표 끊어야지! 학생 일어나라구!!"

"어라? 저 학생 안 일어나구 계속 자네? 거기 학생 좀 깨워봐. 얼른 일어나라구 해."

아저씨는 주변의 학생들에게 은주를 깨우라고 일러두고 은주를 지나 다른 사람 표를 먼저 끊었다. 주변에 있던 언니들이 은주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은주는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했지만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애썼다.

은주가 일어나지 않자 언니들은 은주 좀 깨워보라고 은경을 불렀다. 은경은 다가와 누워 있는 은주를 발로 툭툭 치면서 조용히 말을 걸었다.

"야. 주댕. 일어나. 일어나라구~ 아저씨가 표 끊는 데잖아."

은주가 자는 척한다는 것을 알면서 천연덕스럽게 깨우는 모양새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화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일단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은경은 보는 눈이 있으니 깨우는 시늉만 하고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가 친구에게 속닥 거렸다.

"키키 킥... 야.. 재 안 일어난다. 키키 킥."

은주는 사람 목소리를 잘 기억했다. 한번 들은 목소리도 기억하는데 앙숙인 은경의 목소리를 모를 리 없었다. 은주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자신을 보며 시시덕거리는 은경의 모습이 선했다. 저런 인간을 언니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앞으로도 언니라고 부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저씨는 모두에게 표를 끊어주고 올라가려다 아직도 자고 있는 은주를 발견하고 은주에게로 다가왔다.

아까부터 은주를 지켜보던 상미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은주에게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은주야. 표 값없니?"

은주는 살짝 실눈을 뜨고 상미를 쳐다봤다.

"없으면 언니가 빌려줄 테니까 이제 일어나 봐."

은주는 상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며 잠이 덜 깬 척 앉았다. 상미는 조용히 은주의 주머니에 이천 원을 넣어 주었다.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꾹 참고 아저씨에게 다가가 이천 원을 건넸다. 눈을 마주 칠 수가 없었다.

"학생 빨리빨리 일어나야 할거 아냐. 어디. 고이도? 자 거스름돈!"

아저씨는 인상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몰아붙이고는 선실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는 표값은 큰엄마에게 받아 여객선 터미널에서 표를 끊었다. 은주는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돈이 모자라 벌어진 상황을 이야기했다. 은경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얼라? 엄마가 돈을 삼천 원 밖에 안 줬니? 그러게... 오며 가며 둘이 내려믄 육천 원은 줬어야 허는디... 왜 삼천 원을 줬댜? 갈 때 둘이 내구 올 때 큰엄마 한티 받어서 오지 그렸니?"

"김은경이 자기 들어올 때 써야 한다고 자기 꺼만 내고 내건 안 내줬어!!"

"어이구... 그려서 워쩌케 했냐?"

"상미 언니가 빌려줬어. 빌린 돈 가져다줘야 돼."

"어이구... 저 눔에 지지배를 워쩐다니... 엄마가 계산을 잘못혀서 미안허다. 니가 이해 혀라. 은경이 저 눔 지지배가 정상은 아녀."

곤혹스러운 상황과 비열했던 은경의 행동을 다 설명할 만큼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은주가 이해하고 넘어가는 걸로 순자는 마무리 지었다.

순자는 은경의 그런 행동은 아빠에게 구박을 많이 받아 정서적으로 온전하지 못해 하는 행동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내 새끼가 모자란 것을 어쩌겠냐고 미움을 많이 받아 온전한 정신상태가 아니라고 은경을 두둔했다. 하지만 순자의 등에 올라탄 은경의 폭주는 멈출 줄 몰랐다.

은경은 순자의 눈을 피해 교묘하게 은주를 괴롭혔다. 은주도 은경을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야 김은경"이라고 불렀다. 매번 당하는데도 굽히지 않는 은주의 기세에 은경은 약이 더 바짝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