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판 밑 오백 원

소설 - 바다 별

by 온벼리

"바다 별"이 새로 쓰여 "엄마 없는 밤"이 되었습니다.

바다별은 지우려다 그냥 둡니다. 좀 더 다듬어진 글을 보고 싶으시면 브런치북 "엄마 없는 밤"을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브런치북] 엄마 없는 밤 (brunch.co.kr)


소설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자전적인 에세이 이기도 합니다. 처음 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힘들고 아파서 소설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소설의 매력에 빠지게 되네요. 소설의 형태를 빌어 약간의 조미료가 들어갔을 뿐 실화이고 제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명과 인물의 이름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장판 밑 오백 원

영식의 아버지 월출과 어머니 길려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어머니 길려는 부모를 잃은 오 남매 중 첫째 아들을 양자로 들였고 그 동생들도 함께 고이도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본인의 자식을 낳고 싶었던 영식의 아버지는 죽은 동생의 처인 제수씨를 통해 자식을 낳기로 합의를 했고, 딸 둘 아들 셋을 낳았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 영식이었다. 길려는 영식이 돌이 지나자 집으로 데려 와 키웠다. 영식의 공식적인 어머니는 길려였고 낳아준 어머니는 마을 위쪽인 웃말에 산다고 은주는 웃말 할머니라고 불렀다.

길려는 남편의 뜻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었지만 영식이 예쁘지 않았고 키우는 내내 살갑게 굴지 않았다. 오히려 양자로 들여온 큰아들과 큰아들의 형제들을 선동해 영식과 며느리 순자를 업신여기며 재산도 가장 역할은 하지도 않던 양아들에게 유리하게 분배되도록 힘썼다.

영식은 웃말 친어머니가 부끄러워 무시했고 길려와 형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쓰며 자랐다. 길려는 한집에 살았지만 가족 같은 따뜻함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고이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토끼섬으로 불리는 무인도가 있었다. 영식은 친구들과 무인도에 사는 토끼를 잡으러 간다며 배를 타고 나섰다. 아침에 나간 영식은 오후가 되어 돌아와 죽은 토끼 두 마리를 마당에 내려놓았다. 고기가 귀하기는 했지만 야생동물을 잡아다 먹어야 할 만큼 굶주리며 살지는 않았는데 왜 토끼를 잡아 왔는지 은주는 의아했다.

영식은 친구들의 사냥에 참여하긴 했지만 몸이 약해진 어머니에게 몸보신을 시켜 드리겠다는 명목으로 토끼를 잡아 왔던 것이다.


그날 저녁은 토끼고기였다. 닭백숙을 삶듯 토끼를 가마솥에 푹푹 삶아 내왔고 한 상에 둘러앉아 먹었다. 은주는 배가 고팠지만 토끼를 먹는다는 것이 반갑지 않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허기를 때우고 일어났다. 그날 저녁에 길려는 토끼고기를 아주 맛있게 그것도 아주 많이 먹고 만족스러워했다. 영식은 자신이 직접 잡은 토끼 고기로 효도를 했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모습에 기분이 한껏 들떠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


길려는 다음날 아침 어제 먹은 고기가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밥을 잘 먹지 못했다. 나이가 많아 몸이 쇠약했던 길려는 몸보신한다고 먹은 토끼 고기로 오히려 탈이 난 이후부터 밥을 더 먹지 못했고 점점 더 말라갔다. 길려는 은주에게 자신의 배를 보여 주며 말했다.

"여기 좀 봐봐라... 내가 오래 뭇 살라는 갑다."

앙상한 갈비뼈 아래로 뱃가죽이 등과 맞닿은 듯 움푹 파여 있었다. 길려의 상태는 점점 더 심해졌고 누워서만 지내는 날이 늘어갔다. 병원에 가봤지만 나이가 많고 몸이 약해져 별다른 치료를 할 수 없다는 소리만 듣고 돌아왔다. 길려는 굿을 해야 한다고 무당을 부르라고 했다. 무당은 마루에 한 상 차려놓고 시끄럽게 굿을 하고 갔다.


순자는 거동이 불편해진 길려를 목욕시키려고 방에 큰 고무 통을 끌어다 놓고 가마솥에서 끓인 물을 양동이로 길어다 고무 통을 채웠다. 물을 기르고 다시 퍼다 나르는 일은 엄청난 노동이었고 어른을 목욕시키는 일도 쉽지 않다 보니 자주 목욕할 수는 없었다. 길려에게는 비릿한 냄새가 심하게 났고 은주와 은경은 길려와 같이 방을 쓰는 것을 싫어했다.

"엄마! 할머니 한 테서 비린내 나!!"

"이... 자주 뭇 씻어서 그려... 늙으믄 원래 다 냄새나는겨."


길려는 기운이 없어 손목만 까딱까딱하며 이리 오라고 은주를 불렀다. 장판을 떠들어 감추어 두었던 오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 은주에게 건넸다. 길려가 은주에게 용돈을 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가서 과자 사 먹어라..."

손에 받아 든 오백 원을 보면서 은주는 '과잣값은 이백 원이면 충분한데? 오백 원이면 뭘 더 사 먹지?'하고 순간 기분 좋은 고민을 했다. 습관처럼 고맙다고 말을 해놓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진짜 고마운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봤지만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고마워해야 할 텐데 오백 원이 그저 좋을 뿐 고마운 마음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주는 그래도 꾸뻑 인사를 하고 오백 원을 들고 얼른 나가 버렸다. 그 후로도 길려는 몇 번 더 장판을 떠들어 오백 원을 주었다.


문밖이 시끄러운데 오늘따라 유난히 잠에 취해서 일어나지 못하는 은주를 순자가 흔들어 깨웠다. 은주는 어젯밤에도 평소처럼 작은방에서 은경과 길려와 함께 셋이서 잠이 들었었다. 채 잠이 깨지도 않았는데 순자는 은주를 일으켜 세워 마루로 데리고 나왔다.

"엄마~ 왜!! 나 졸려~ 더 잘 거라구~"

"은주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안방이 가 있어."

"응? 뭐라고?"

방금 전까지 할머니 옆에서 자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은주는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집 안팎으로 시끄러워지더니 점점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평소에 은주네 집에 오지 않던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일사불란하게 장례 준비를 했다. 안방 아랫목에 길려의 관이 자리를 잡았고 병풍이 쳐졌다. 잔치집이라도 된냥 부엌에서는 전을 부치는 기름 냄새가 진동했고 안방에는 매캐하고 기분 나쁜 향 냄새가 가득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모르는 하얀 천막이 마당에 쳐졌고 바닥에는 돗자리가 깔리고 상이 펼쳐졌다. 어른들의 건조하고 감정 없는 곡소리도 들려왔다. 문상온 동네 사람들은 안방을 수없이 들락거렸다.


장례가 한창인 대낮에 손님들이 북적이는 마당 한가운데서 사촌 남동생 승철이와 은주의 싸움이 벌어졌다. 은주에게 사촌이라는 단어가 붙은 사람들은 할머니 길려의 양자로 들어온 큰아버지 형제의 자식들을 말한다.

승철이는 마당에 깔린 자갈을 한 움큼 집어 은주에게 던졌고 돌이 은주의 머리에 '빠박'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머리가 띵하고 눈앞이 아찔했지만 은주도 질 수 없어 똑같이 자갈을 한 움큼 집어 승철에게 힘껏 던졌다. 주거니 받거니 자갈 세례에 눈물도 났지만 지지 않겠다고 핏대를 세우며 싸웠다. 아무리 애들이라지만 할머니 장례식날 싸움하는 꼴이 보기 좋을 리가 없다는 것쯤은 은주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절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승철이가 분명 먼저 시비를 걸었고 돌도 승철이가 먼저 던졌다. 유란이의 동생 승철이는 화가 나면 칼을 들고 덤비는 막돼먹은 놈이라 은주는 죽어도 져 주거나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 집은 아이들을 도대체 왜 그 모양으로 키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문상온 손님들의 눈길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었다. 어른들이 혼내며 말렸지만 불꽃 튀던 싸움은 승철이가 밖으로 끌려 나가고 나서야 끝이 났다. 은주는 일부러 싸움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길려가 가는 길에 보고 가라는 듯 당당히 눈을 부릅뜨고 싸웠는지도 모른다.

왜 그랬냐고... 아빠와 우리 가족에게 꼭 그렇게 했어야 했냐고... 그래서 당신의 속이 시원했냐고...


은주는 길려의 장례식이 슬프지 않았다.

은경이 데리고 온 눈도 못 뜨고 하루 만에 죽은 새끼 고양이가 죽었을 때도 미안하고 슬펐고, 일 년 키운 진돗개 백구가 죽었을 때도 목놓아 울었는데... 십 년을 같이 산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만큼 아무런 감정도 올라오지 않았다. 아빠와 엄마를 지독히 미워했고, 친척들 앞에서 우리 가족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을 서슴없이 했으면서도 늘 당당했던 할머니였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조금의 정도 주지 않았던 사람.


그동안의 매정했던 세월을 갚기에 할머니의 장판 밑 오백 원은 턱없이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