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뱅이의 밤

소설 - 바다 별

by 온벼리

"바다 별"이 새로 쓰여 "엄마 없는 밤"이 되었습니다.

바다별은 지우려다 그냥 둡니다. 좀 더 다듬어진 글을 보고 싶으시면 브런치북 "엄마 없는 밤"을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브런치북] 엄마 없는 밤 (brunch.co.kr)


소설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자전적인 에세이 이기도 합니다. 처음 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힘들고 아파서 소설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소설의 매력에 빠지게 되네요. 소설의 형태를 빌어 약간의 조미료가 들어갔을 뿐 실화이고 제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명과 인물의 이름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주정뱅이의 밤

영식은 술독에서 잠수라도 하고 나온 사람처럼 술에 절어 눈이 풀리고 혀가 꼬여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뱉으며 집으로 들어왔다. 비틀비틀 걸어 들어오는 모양새가 딱 봐도 작정하고 마신 듯했다. 선박용 연료가 담긴 20리터짜리 기름통을 들고 와 마루 위로 신발을 신은 채 올라섰다.

"내가~ 이? 씨브럴~ 이 눔에 집꾸서글 이? 다!! 불 질러 버릴껴~ 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 다급해진 영식의 어머니 길려와 순자가 달려들어 말려 보지만 영식은 두 여자를 밀쳐내고 연료 통의 뚜껑을 열어 마루 끝에서부터 기름을 뿌리기 시작했다. 영식과 두 여자의 몸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영식은 자기가 뿌린 기름 위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미끄러져 벽에 부딪히며 나자빠졌다. 미끄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주머니에 라이터를 어렵게 꺼내 들은 순간 영식을 빼고 모두 얼음이 되어 버렸다. 영식의 눈치를 살피던 순자가 잽싸게 달려들어 죽기 살기로 라이터를 빼앗으려 몸싸움을 벌이며 뒹굴었다.


라이터를 빼앗긴 영식은 두리번거리며 끝장낼 무언가를 찾겠다는 듯 부엌 옆에 연결된 LPG 가스통을 끄집어냈다. 가스통이 무거워 쉽게 움직이지 않자 낑낑대며 어깨에 들쳐 메고 비틀거리며 작은 방안에 내려놓고는 가스 밸브를 풀어버렸다. 순자는 열린 밸브를 재빨리 잠그고 영식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은주는 고성이 오가고 몸싸움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며 지옥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술에 많이 취하면 저렇게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은주는 은진이와 함께 하필 작은방에 있었다. 아주 큰일이 벌어지고 있고 당장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에 몸이 떨려 왔다.

끌려나간 영식은 마당에서도 요란한 몸싸움을 벌였다. 시끄러운 소리에 상황을 지켜보다 못한 옆집과 앞집의 사람들이 영식을 붙들어 말리기 시작했다. 참견하는 사람이 많아지니 영식은 쉽게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주정뱅이와 대화로 풀어 보겠다고 영식을 설득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술에 취해 불을 지르겠다는 사람과 말이 통할 리가 없었고 결국 영식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대문 밖으로 멀찍이 끌려 나갔다.

마당은 조용해졌고 옆집 아주머니가 흐느끼는 순자를 위로하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밤이 깊어가고 있지만 작은 방에 가스통은 그대로였다. 방 밖으로 만이라도 옮겨 보려 했지만 은주의 힘으로는 겨우 들썩거리는 것이 전부일뿐 들어서 문턱을 넘기는 일조차 가당치도 않았다. LPG 가스통이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경험을 하고 나니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러웠다. 은주는 막무가내로 당해야만 하는 이런 상황들이 죽도록 싫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비참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동생 은진이를 부둥켜안고 잠을 청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는 쉬 잠잠해지지 않았다. 한참을 다독이자 은진이는 어렵게 잠이 들었다. 은주는 이 밤이 빨리 지나가게 해 달라고, 밤새 무사히 별일 없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를 하다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눈을 떠 보니 아늑하고 따뜻한 아침 햇살이 작은 창문을 가득 채우고 방안을 밝히고 있었다. 가스통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밤새 요란했던 폭풍은 아침을 더욱 고요하게 만들었다. 햇살은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마법을 부리는 것 같았고 어둡고 두려웠던 밤은 빛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유난히 햇살이 밝고 따듯한 아침이었다.

누워있던 은주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향해 일어나 앉아 눈을 감고 햇살을 느꼈다. 그리고 밝게 빛나는 아침의 평온함에 감사했다.


봄날의 햇살은 은주에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어 주곤 했었다.

마당 담벼락 옆에 쌓아 놓은 밧줄 더미 위로 올라가 누우면 일광욕을 즐길 수 있었다. 은주는 둥글게 말린 밧줄 더미 위에서 튜브를 타듯 엉덩이를 쏙 집어넣고 팔과 다리를 걸치고 하늘을 향해 누워서 눈을 감았다. 분명히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은 온통 빨갛다. 밝은 빛이 어떻게 빨갛게 보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은주는 눈 커플마저 통과해 버리는 햇살이 너무 좋아 가슴이 벅찼다. 조용히 누워 눈을 감고 따뜻한 햇살을 즐기고 있자니 나른 함이 밀려와 어느 순간 스르륵 잠이 들어 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은주는 영식이 무섭지 않다. 미운 적도 없다. 다만 이런 상황들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버겁고 무서울 뿐이다. 순하고 매끄럽게 풀어가면 좋으련만 영식의 걸음은 허구한 날 시끄럽게 덜컹거렸고 삐걱거렸다. 은주는 그런 영식이 안쓰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