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달리기

소설 - 바다 별

by 온벼리

"바다 별"이 새로 쓰여 "엄마 없는 밤"이 되었습니다.

바다별은 지우려다 그냥 둡니다. 좀 더 다듬어진 글을 보고 싶으시면 브런치북 "엄마 없는 밤"을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브런치북] 엄마 없는 밤 (brunch.co.kr)


소설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자전적인 에세이 이기도 합니다. 처음 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힘들고 아파서 소설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소설의 매력에 빠지게 되네요. 소설의 형태를 빌어 약간의 조미료가 들어갔을 뿐 실화이고 제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명과 인물의 이름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달리기

학교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학부형들은 열일을 제쳐두고 나와 준비를 도왔다. 소풍을 갈 때도 그랬고 운동회를 할 때도 그랬다. 소풍은 섬안에서 바닷가 모랫길을 한참 걸어 널따란 해안가로 가는 것이 전부였지만 학부형들은 선생들의 점심을 준비해 싸들고 함께 움직였고 게임도 참여하면서 그 날 만큼은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운동회를 하는 날은 하루 종일 운동장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와 쩌렁쩌렁한 구령 소리가 온 동네를 흔들었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나와 오랫동안 연습해온 매스게임이나 부채춤을 구경했고, 줄다리기나 공 굴리기에도 참여하면서 청군 백군을 응원했다. 동네에 두 개뿐인 슈퍼에서는 리어카에 갖가지 간식을 싣고 원정 판매를 나왔고 특별히 가을 운동회 때는 실에 꿰어 파는 찐 밤이 별미였다.

가족들은 소풍 나오듯 김밥을 싸 들고 나와 운동장 구석구석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운동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운동회날은 학부형들에게 세월을 거슬러 자신의 국민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은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운동회의 백미는 달리기였지만 끈기가 아닌 체력으로 하는 모든 운동에서 꼴등을 차지했던 은주는 특히 달리기를 싫어했다. 은주는 기관지염에 감기를 달고 살아서 체력이 약했고 조금만 뛰어도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벌렁거리며 심할 때는 구토까지 했다. 그러니 모든 체육활동의 종합세트였던 운동회가 즐겁지 않았고 달리기는 정말 최악이었다.


운동회가 끝나갈 즈음 학부형과 함께하는 달리기가 시작됐다. 경기는 출발선에서 뛰어 나가 바닥에 돌로 눌러놓은 종이쪽지에 적힌 사람을 찾아 함께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아 골인을 하는 경기다. 쪽지에는 할머니 같은 불특정 한 사람이 적혀 있기도 했고 교장선생님, 부녀회장님 같은 지정된 사람이 적혀 있기도 했다. 은주가 집어 든 종이는 '학부형 회장님'이라고 쓰여 있었다. 학부형 화장이라면 학생회장인 헌이의 아빠를 말하는 것이었다.

"학부형 회장님~ 학부형 회장님~~~"

은주가 두리번거리며 학부형 회장을 불렀지만 헌이의 아빠는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달리기는 출발이 중요한데 함께 뛸 사람조차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은주를 지켜보던 영식은 도와주고 싶어 앉았다 일어났다 엉덩이를 몇 번씩 들썩 거리다가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은주의 손을 잡았다.

"에이~ 모르겄다~ 부회장두 회장이니 깨~ 얼릉 뛰어!!"

은주는 영식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주시하며 함께 긴장하고 있었던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영식은 뒤쳐진 거리를 좁히기 위해 은주의 손을 잡고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아이와 성인 남자가 뛰는 속도의 차이는 치타와 곰이 뛰는 정도의 속도 차이라고나 할까? 어른들의 손을 잡고 달리던 아이들은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기도 했고 아이들의 평소 실력과는 상관없이 어른들의 실력에 따라 골인하는 순서가 확연히 달라졌다.

특히 어른들끼리의 달리기는 은주가 봐도 흥미진진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전이었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트랙 곁으로 나와 세상에 이렇게 신나는 볼거리가 없다는 듯이 환호하며 소리 높여 응원했다. 흥미진진해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고 은주의 심장도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뒤늦게 출발했지만 예상보다 꽤 달리기를 잘했던 영식 덕분에 은주가 앞서 가는 아이들을 추월하는 경이로운 일도 벌어지고 있었다. 영식은 은주가 넘어지지 않는 선에서 바람처럼 달렸고 은주는 발이 땅에 닿지도 않고 날면서 달리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날 은주는 처음으로 달리기에서 2등을 했다. 그리고 아쉬웠지만 잘 달렸다고 만족해하는 영식의 미소를 보며 영식이 저렇게 더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달리기에서도 저렇게 있는 힘을 다해 만족스러운 질주를 할 수 있다면 영식도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