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바다 별
"바다 별"이 새로 쓰여 "엄마 없는 밤"이 되었습니다.
바다별은 지우려다 그냥 둡니다. 좀 더 다듬어진 글을 보고 싶으시면 브런치북 "엄마 없는 밤"을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브런치북] 엄마 없는 밤 (brunch.co.kr)
소설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자전적인 에세이 이기도 합니다. 처음 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힘들고 아파서 소설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소설의 매력에 빠지게 되네요. 소설의 형태를 빌어 약간의 조미료가 들어갔을 뿐 실화이고 제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명과 인물의 이름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영식은 죽기 한 달 전쯤에 은주에게 전화를 걸어 어항으로 오라고 했다. 은주는 중학교에 들어간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고, 희선이네 집에서 하숙을 시작했을 때였다. 은주는 영식이 왜 부르는지 알지 못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토를 달지 않고 고분고분 영식의 말을 따랐다. 영식은 어색한 시간일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은주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봐야겠다는 마음에 용기를 냈다.
영식은 버스 정류장에서 은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판장 옆으로 길게 늘어선 횟집 골목을 지나 구석진 곳에 있는 다방으로 영식을 따라 들어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니 사방이 막혀 답답해 보이는 실내에 주황색 소파들이 서로 마주 보며 빼곡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방에 들어선 영식은 마담과 꽤 친한 듯 인사를 했다. 은주는 영식이 마담과 친하다는 것이 살짝 기분이 나빴다.
영식은 소파에 앉아 마담을 불렀고 메뉴판도 볼 것 없이 따듯한 쌍화차 한잔과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붉은색 립스틱을 진하게 바르고 껌을 질겅대며 씹던 마담은 은주를 보며 영식에게 물었다.
"딸이야?"
"이... 둘째 딸이여. 인사 혀야 지."
"안녕하세요."
은주는 마담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인사하라는 말에 얼른 일어나 인사를 뱉어 버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주 앉은 영식은 은주를 보고 작정이라도 한 듯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학교는 댕길 만 허냐?"
"응..."
"학교가 먼디 워쩌케 다니냐?"
"버스 타고 다니지."
"버스는 타구 댕길 만 허냐?"
"응. 맨날 버스가 터질 것 같애... 애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타니까 아저씨가 애들을 뒷문으로 태워. 표는 내릴 때 받고. 애들이 뒷문에 막 매달려 있거든 그러면 아저씨가 앞문으로 내려서 애들을 막 밀어 넣어. 그래서 가끔은 친구들이랑 걸어서 내려올 때도 있어."
"에휴... 하숙집은 워뗘? 친구 누구 집이라구?"
"희선이."
"이... 그려 희선이. 희선이네 집이서는 있을 만 허냐?"
"응... 희선이랑 친해. 희선이네 엄마랑 아빠도 좋은 거 같애."
"그 집은 애가 몇이냐?"
"둘. 남동생 하나 더 있어."
"이...... 그 집 아빠는 뭐 헌다니?"
"공무원이래."
"이...... 너 공부는 잘 되냐?"
"음...... 그냥 그렇지..."
은주는 영식을 빤히 쳐다보았다. 공부가 잘되냐고 물어보다니. 모든 질문이 그랬지만 언제부터 은주의 공부에 관심이 있었는지 영식의 질문이 신기했고 더 이상 대답할 말이 없어 은주는 주스를 들이키며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촌스러운 그림액자를 쳐다보았다. 공부를 잘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은주는 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그냥 수업을 들을 뿐이었다. 영식은 그것도 모르나 보다.
잘 지내냐고 물어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곁에 있었으니 잘 지내냐고 물어볼 일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학교를 다녀오면 잘 다녀왔는지, 무슨 일은 없었는지, 병원에 다녀오면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 잠을 자고 일어나면 밤새 잘 잤는지, 많이 아플 때면 어디가 아픈지, 괜찮아졌는지 쯤을 물어보는 게 부모 자식 간의 일반적인 대화였을 텐데 영식은 그런 사소한 대화조차 한 적이 없었고 오늘 다방에서 마주 앉아 은주를 보며 처음 안부를 물어보니 모든 질문들이 어색하기만 했다. 영식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은주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었고 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물론 은주도 영식과 주고받는 대화가 익숙하지 않아 단답형 대답만 하고 말을 끝냈으니 대화가 길게 이어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영식이 미리 생각해온 질문들은 금방 동이 났다. 아무 말 없이 침묵이 흐르는 시간이 길어지자 영식은 일어나 카운터에 있는 마담에게 가서 농담을 하며 어색함을 모면해 보려고 했다.
주스를 빨대로 쪽쪽 소리가 나도록 다 빨아먹어버린 은주는 주스컵에 보리차를 조금 따라 탁해진 보리차를 빨대를 가지고 장난을 치며 영식을 가끔씩 쳐다봤다. 영식은 마담과 더 편하게 대화하는 듯했다. 한참을 마담과 농담을 주고받던 영식은 찻값을 내고 은주에게 가자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국밥집에 가서 소머리국밥을 한 그릇씩 먹었다. 뜨거워 천천히 먹는 은주에 비해 영식은 후후 불며 후루룩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멀뚱멀뚱 밖을 내다봤다. 영식은 때마침 식당으로 들어온 남자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밥을 다 먹고 다시 대천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용돈 이만 원을 손에 쥐어 줬다. 거금의 용돈을 받아 든 은주는 놀라 영식을 바라봤다.
"뭐야?"
"용돈이여."
"왜케 많이 줘? 엄마가 일요일에 돈 줬는데?"
"그건 생활비 쓰구... 이거는 너 사 먹구 싶은 거 사 먹어."
"그냥 주는 거라고?...... 알았어.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에 씨익 웃어 보이는 영식을 보니 눈가에 주름이 선명했다. 머리에도 흰머리가 제법 많이 늘어 있었고 예전보다 머리카락도 많이 빠져 널따란 이마가 더 넓어지고 있었다. '대머리가 되려나? 할아버지도 대머리였나?' 은주는 생각했다. 긴 반곱슬 머리는 파마를 한 사람처럼 구불거렸다. 마흔한 살의 영식은 늙어가고 있었다.
영식은 은경도 어항으로 불러서 만났다. 은경은 영식을 무서워했다. 무시하고 윽박지르던 많은 시간들이 쌓여 은경은 영식이 부르면 긴장부터 하는 것이 버릇이 됐다. 조금이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자신이 받아온 무시를 은경에게 풀듯이 쏟아 내곤 했던 영식으로 인해 은경은 자존감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뭇~난 지지배 같으니라구."
은경을 대하던 영식의 말투에는 못마땅함이 가득했었다. 그 한마디는 은경을 주저앉게 만들었다. 못난 것들은 보기도 싫다는 듯이 자신이 받았던 서러움을 자식들에게 그대로 대물림했던 것이다. 어쩌면 본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못난 놈이라고...
영식은 은경에게는 생일이라고 용돈 오만 원을 줬다. 은경은 영식에게 생일 용돈을 받아 본 것이 처음이다. 은경은 그날 영식이 무섭지 않았다. 영식의 말투는 유난히 부드러웠고 따뜻하기까지 했다. 영식을 만난 은경은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 기숙사로 돌아간 은경은 영식에게 받은 용돈으로 밖에 나가 친구들과 저녁을 먹었고 친구들에게 생일 축하도 받았다.
은주는 영식이 죽고 한참 뒤에 영식이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어항으로 불렀던 것을 알게 되었다. 주말에 고이도를 오가면서 보기는 했지만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어항에서의 그날이 마지막 인사였던 것이다.
은주는 소중하게 아꼈어야 할 그 시간의 의미도 모르고 스쳐가는 바람처럼 흘려보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순자는 나중에서야 영식이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죽을 때가 되믄 사람이 변한다더만... 느의 아빠가 그렸다. 자기가 죽을 줄 알구 있어서 그렸나."
순자는 이제 정신을 좀 차리나 보다 싶더니 죽었다고 말했다. 순자와는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에 걸쳐 인사를 했겠지만 순자가 혼자 짊어져야 할 세월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순간 모든 것들과 끊어져 버린다. 감사하게도 영식은 사고로 죽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 배려로 주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은주의 입장에서는 영식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은주는 영식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연락을 주고 얼굴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었더라면... 염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할 수 있게 조금만 더 기다려 줬더라면... 은주가 오랫동안 영식을 붙잡고 있지 않았을 것이고 조금 더 빨리 떠나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은주는 장례 이후 영식의 꿈을 자주 꾸었다. 꿈에서 영식은 커다란 여행가방을 들고 멀리 여행을 다녀왔다고, 그동안 연락 못해서 미안했다고 은주를 안아 주었다. 은주는 그동안 많이 원망했다고 돌아와 줘서 고맙고 기쁘다고 영식을 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울다가 깨어나면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꿈의 여운이 남아 그대로 앉아 또 한참을 울었다.
어떤 날 꿈에서는 멀리서 다른 사람들과 새 삶을 사는 것을 지켜보게 되고, 그런 영식을 원망하며 배신감에 눈물을 흘리다 깨어 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영식은 은주의 꿈에서 오랫동안 살아 있었다. 그래서 은주는 영식이 어딘가에 살아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모두 나를 속이고 연극을 하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물론 이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미친 거 아니냐며 자신을 타박했고 꿈도 빨리 잊으려 애를 썼다.
영식은 은주의 꿈에서 팔 년 동안 살아 있었다.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던 은주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시간은 그리움의 폭풍을 잠재우기 시작했고 영식의 얼굴은 서서히 기억에서 희미해져 갔다.
영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은주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영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