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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e a week Apr 02. 2017

사랑의 '한계' 그리고 '본질'에 대하여

박현욱 <아내가 결혼했다>

진짜 옛날에 나온 책. 손예진 나오는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이다.


세번째 독서모임이 끝났다. 유난히 부담+기대가 가득했던 이번 모임. 기대가 가득했던 건 한번쯤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다자연애'라는 주제를 다룬 책 <아내가 결혼했다>가 이번 책이었기 때문이고, 부담이 가득했던 발제자였기 때문이다.. 토론자로 참여했으면 맘편히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을텐데 흐아... 발제는 정말 어려운 것이었다! 내 생각보단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더 많이 듣고 어떤 방향으로 토론을 이끌어가야할지 생각해야하고 (정작 제대로 이끌진 못했지만..ㅠㅠ), 대화의 지분율(?)을 따져가며, 말이 없는 저 분이 리뷰에 뭐라고 썼더라 생각하며 그 분께 질문을 하고,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정적! ... 갑자기 아무도 말을 안하면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해서 별로 내 생각이지도 않은 헛소리를 내놓기도 하고 ;ㅅ; 뜬금없이 내 연애(흑역)사를 털어놓기도 했다 ;ㅅ; ... 끝나서 맘이 정말 편하다!! 징징거림은 여기까지하고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처음 책 리뷰를 쓸 땐 사랑의 한계에 대해 생각했고,
토론이 끝난 후엔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사랑은 무엇인가? 심리학자 로버트 스턴버그는 사랑은 친밀감, 열정, 헌신으로 구성되어있다고 정의내렸다. 친밀감은 사랑하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가깝고 연결되어있으며 결합되어 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서로간의 정서적 교감, 소통이 이뤄진다는 느낌. 열정은 사랑하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낭만, 신체적 매력, 성적인 몰입 등을 말한다. 그리고 헌신은 사랑을 지속시키겠다는 결심과 믿음을 일컫는다. 이 세가지 요소의 크기에 따라 사랑의 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대다수의 사랑은 처음엔 열정의 크기가 컸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열정은 사라지고 친밀감과 헌신만으로 구성된 사랑이 남는다. 그리고 더욱 나중엔 친밀감마저 사라지고 (최근 회사의 유부 선배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아이 키우고 하다보면 애 얘기 아니면 할 얘기가 없다고....외로우시다고들...) 헌신만 남은 관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의 한계에 대해 생각했다. 열정이 없어진 관계라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또 다시 열정을 지펴오르게 하는 사랑을 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럴 때마다 헤어지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반복을 해야하는 것인가? 만약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관계라면? 결혼을 했다고 해서 열정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나? 결국 결혼했기 때문에 그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혼은 인간의 본성과는 맞지 않는 제도가 아닌가? 결혼이라는 제도가 없었다면 과연 헌신만 남은 관계를 지속시킬 이유가 있는가? 그래서 다자연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관계를 아직 끝내고 싶지 않지만, 새로운 열정을 지펴오르게 할 관계도 필요하니까.


자신의 행복에 대한 욕망을 솔직히 말하는 인아. 행복하려고 사는건데, 그 행복이 사랑이라면?


하지만 한편으론 다자연애의 가장 큰 맹점은 이 사람이 완전히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단 거다. 이 사람이 나 말고도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것. 우린 사랑을 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갖고 싶어서 투쟁하는데! 그 사람의 일부 시간도 아니고, 그 사람 자체를 다른 사람과 나눠 가져야한다니. 토론에선 이 부분이 중점적으로 얘기됐다. 내가 독점하고 싶은 욕망과 상대가 자유롭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어디까지 인정해줄 수 있는가. 


그래서 토론이 끝나고 난 후에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내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할 권리가 있는가? 상대가 다른 이성(혹은 동성)을 만나는 것, 늦게까지 술을 먹는 것은 그의 자유이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면 내가 무슨 권리로 막을 수 있는 걸까? 그가 나를 떠날까봐 불안하기 때문이지 않은가? 만약 신뢰가 두텁다면 충분히 인정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만약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 인해서 행복하다면,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동시에 나를 사랑하고,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신뢰가 있다면 그것 역시도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랑은 결국 상대의 행복을 나도 기꺼이 행복하게 받아주는 것이니까.


인아의 두 번째 남편이 되기로 한 재경, 상대의 감정은 내 것이 아니니까 존중하겠다고 말한다.


일대일의 배타적 관계(모노가미)만을 정답으로 생각해왔지만 오히려 다자연애를 통해 사랑의 한계와 본질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게 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직 모든 것이 뿌옇기만 하지만 최근의 경험들과 이 책을 통해 단 한가지만은 명확하게 다짐했다. 상대가 무엇인가로 인해 행복하다면 그것은 나에게도 큰 행복이니까, 지지해줄 것.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 물론 늘 그렇듯 머리로 백번 새겨도 그 상황이 막상 닥치면 부들부들해지는게 사람 마음이긴 하다만. 아래는 책을 읽고 처음 쓴 리뷰다.




"좀 더 나중에 만났더라면 좋았을 걸." 열아홉 살 첫사랑과 나누었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어렸던 나이에 누군가를 처음으로 열렬히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의 끝을 어렴풋이 알았나보다. 아무리 많이 좋아하더라도 다른 대학교로의 진학, 군대, 취업 등 삶의 큰 변화에 맞서서 모든 장애물을 다 이겨내고 관계를 지속시키기 어려울 것이란 건 빤했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이 퐁퐁 솟아나는 호르몬이 2년만에 사그라든다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나중에 만났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그 맘이 이해가 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최고로 꼽는 사랑 이야기에는 타이밍에 대한 아쉬움이 빠지지 않는다. (봄날은 간다, 건축학개론, 500일의 썸머, 그리고 최근엔 라라랜드까지..) 

그래서 장애물을 극복한 사랑 이야기는 늘 낭만적이다. 하지만 '낭만'에 너무 주목하게되면 불타오르는 시기를 지나서 다가오는 권태로운 시기를 견디기가 어렵다. 낭만이 없는 건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얼마 전 출간한 알랭드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바로 호르몬이 퐁퐁 솟아나는 시기를 지난 후의 일상적인 이야기, 즉 현실적인 사랑의 방법을 그려냄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현실적 사랑에 대한 방법론 역시도, 결국 목적은 한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함이었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낭만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의 낭만과 그 방법론을 절절하게 받아들이며 책의 구절들을 밑줄을 팍팍 쳐가며 마음 속에 새겨놨다.  


그랬던 나이기에 처음 <아내가 결혼했다>를 읽었을 땐, 이런 지 밖에 모르는 애가 다 있나, 상처받는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라며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책을 읽을 수록 <아내가 결혼했다> 역시 한편으론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과도 일맥상통한단 생각이 들었다. 결국 덕훈과 인아의 선택은, 그 둘이 헤어지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덕훈이 '완벽한 1:1의 사랑과 결혼'만을 주장했다면 결국 둘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조금은 (일반적인 시각에서) 완벽하지 않더라도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인아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결국 사랑의 한계에 대해 말할 수 밖에 없다. 호르몬 퐁퐁의 시기는 제한적이고, 한 사람만을 오래토록 사랑한다는 건 인간의 본성과는 맞지 않다. 다만 우린 경험적으로 누굴 만나도 어차피 그 퐁퐁의 시기는 끝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진정 사랑하게 된 사람과 뜨거운 시기를 지나서도 그 사랑을 유지시켜보고자 한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도 <아내가 결혼했다>도, 그 지점에서 본다면 모두 1:1 관계에서 사랑의 한계를 뛰어넘고자하는 이야기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전자가 기존의 제도와 현실 (일부일처제) 안에서 방법을 모색한다면, 후자는 기존의 제도와 현실 밖에서 방법을 모색한단 것이다. 따라서 전자의 노력은 "한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마음 수련"이고, 후자의 노력은 "상대의 자유를 인정하고, 소유욕과 질투를 다스리는 마음 수련"이 된다. 결국 어느 것을 선택하든 정신 수양은 필요하다.

현재의 결혼이라는 제도 역시도 사랑에서 인간의 본성과는 맞지 않는 제도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갈구할 수 밖에 없는 본성 외에도, 안정의 추구, 사회적 활동에 대한 열망 등 다양한 본성이 있다. 이러한 모든 본성이 합쳐진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결혼제도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것은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지금 이 사회에 맞는 제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딩크족과 비혼족의 증가, 전형적인 4인 가족의 붕괴와 1인 가족의 폭발적 증가, 개개인의 삶에서의 만족과 행복이 더욱 중요한 가치로 떠오른 시대(혹은 애낳고 살기엔 너무나 팍팍해져버린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제도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늘어나는 결혼 졸업이나 황혼 이혼 역시도 이런 변화한 현실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정말 나이스 초이스가 필요하다.(독서모임 이름이 나이스 초이스라서....이 말이 나오는 것이당..ㅎㅎ)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가장 잘 구현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선택해야 한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이 선택지의 범위를 엄청나게 넓혀 준 책이었다. 지금까지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균열을 내고, 일반적인 것 외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보게 하는 책.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와 덮고 난 후의 생각이 이렇게 달라진 것을 보면, 분명 설득력 있는 책이었다. 특히 인아와 덕훈의 끊임없는 대화, 인아와 덕훈의 각기 주어진 문제에 대한 노력(인아의 두집살림과 덕훈의 질투다스리기)이 바로 그 설득력을 만들어냈다. 결국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무엇을 선택하든 상대와의 충분한 대화와 선택에 대한 책임과 노력이 뒤따라야한다는 것. 모노아모리든 폴리아모리든, 아모리(사랑)는 나와 상대가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란 건 변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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