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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e a week Apr 19. 2017

일상의 회복, 치앙마이 2

함께를 기르는 법 1

이번 글도 자기 고백으로 시작해본다. 주위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바운더리 안에 있는, 특히 가장 가까운 사이인 연인의 경우엔 그게 아니란걸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이렇게 의존적인 사람이었다니 속은 느낌마저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연애는 다 망했다. 모든 건 나의 의존성 때문이었다.


나는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하지만 소심한 나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자신이 없었다. 사실 지금도... (아주 조금은 생겼을지도....모른다) 자유로워진다는 건, 내 손안에 꼭 쥐고 있는 무언가를 놓아야 가능하다. 가령 스타트업에서 열정을 쏟아 붓고 일을하려면,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을 그만두어야하지만 솔직히 그럴 자신이 없다. 세계 여행을 떠나려면 계획을 세우고 과감히 실행에 옮겨야하지만, 여행이 끝나고 난 후가 두려워 계획을 세우지도 못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자유로워지지 못해서, 자유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마치 나도 그들처럼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의존적으로 굴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떠나버리면, 내 삶은 다시 회색이 될테니까.


이번 글엔 마땅한 사진이 없어서.. 자유로워보이는(?) 도이수텝 사원 풍광을 올려봤다
황금빛 사원이 유명한데, 자유로운 느낌의 사진을 넣어야해서(?).. 전망대 사진을 살포시


힘든 일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들여다봐야 한다.


어렴풋이 내가 자유로움을 동경한다는 느낌적 느낌을 받았지만 제대로 이걸 들여다본적이 없었다. 어렴풋이 의존적인 내가 관계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알았지만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이걸 들여다보려면 내가 사실은 독립적이지도 않고, 진취적이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야하니까 말이다. 그것 자체가 나에겐 엄청난 자존감의 상처이기 때문에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때론 들여다봐야만 나아지는 것들이 있다. 그냥 두면 언젠가는 터져버리게 되어 있는 것들 말이다. 나의 경우엔 그것이 지난 연애가 끝난 후 펑-하고 터진 것이었다. 일상이 모두 무너져내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걸 다시 쌓아가는 그 첫 번째 시작점은 바로 나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된 것이 바로 치앙마이 여행에서였다.


여행에서 낯선 좋은 분들을 만났다. 낯선 좋은 분. 낯설다는 건 처음보는 사람들이란 의미다. 원래의 나를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한다하더라도 "넌 원래 그렇잖아, 넌 그게 문제야" 라고 지레짐작해서 판단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좋다는 건 서로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줄만큼 열린 마음과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란 의미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포장하지 않고 술술 풀어낼 수 있었고, 이 낯선 좋은 분들은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해주기도 하고 때론 내가 피하려고 했던 나의 의존성을 정확하게 짚어내기도 했다. 이 낯선 좋은 분들은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가서, 이미 나를 알고있는 관계와 전혀 엮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리고 또 그들도 '서로'의 가장 치부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을 내려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나만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아닌 '서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서로가 힘든 이야기들을 꺼내보이기에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고 최대한 솔직하게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역시 딱히 마땅한 사진이 없어.. 낯선 좋은 분들과 함께 했던 치앙마이 동네 맛집 :)
뭔가 윤식당 느낌이 나는듯 하기도 하고
향긋했던 스프링롤
주로 낮에 뭔가를 먹으며 엄청 얘기를 쏟아냈다! 밤도 아니고, 술도 없이!


스스로 자유로워져야 한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나니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자유로움을 추구한다면 나 스스로 자유로워져야한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가 자유로운 사람을 만나든, 좀 더 현실적인 사람을 만나든 그 사람이 가진 '자유로움'이라는 속성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결국 혼자서도 행복해야 함께 있어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상대에게서 계속 갈구하려고 하다보면 자연히 관계의 무게중심은 그것을 갖고 있는 상대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나 혼자서도 온전하게 행복하다면 관계의 무게중심은 수평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더욱 좋아할 수 있다.


치앙마이에서 머물렀던 곳 거울에 써 있던 예쁜 말. "You are so Beautiful as you are!"

 

(그치만 나 자신을 뷰리풀하게 여기는 만큼, 스스로 잘못된 점을 알고 고쳐나가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게 진짜 자존감을 높이는 일 아닐까..? 내가 나 스스로를 진짜로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거니까.)




누군가와 함께할 때 또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수도 없이 들었을 평범한 말이다. 이 평범한 말들이 갑자기 아주 크고 생생하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다. 상대가 스스로 내 입장에서 생각해달라고 말할 때가 아닌 제 3자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 제 3자는 이 관계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굉장히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또 하나는 직접 그 상대의 입장을 겪을 때다.


나는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며, 주로 엄마와 시간을 보낸다. 너무나 당연한 존재인 엄마. 최근엔 이 당연함 때문에 굉장히 많이 부딪혔는데 서로 너무 익숙하다보니 때론 각자의 바운더리를 무시해버리는 행동이나 말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의식하지 못한 채) 해버린 탓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의도치 않게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좀 더 당당한(?) 입장을 취했는데, 아마도 그건 엄마는 나를 당연히 많이 사랑하고 결국 져줄 수 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난 첫째는 좋은데, 둘째는 싫어.


그런데 여행에서 만난 낯선 좋은 분 중 한 분 (50대 아주머니)이 자식들에 대해 말하면서 이렇게 얘기한 것이다. 둘째랑은 같이 있으면 어색하고 잘 안맞아서, 둘째가 집에 있는다고 하면 아주머니는 없는 약속을 만들어서 외출을 하신다고 한다. 첫째랑은 둘이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자주 하지만, 둘째랑은 대화도 잘 안한다고. 오... 충격이었다. 엄마가 나를 안좋아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거다. 아무리 내리사랑이라고 한다해도, 부모와 자식 역시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기 때문에 케미라는 게 있을 수 밖에 없고 그게 맞지 않는 자식도 있을 수 있구나. 머리를 댕-하고 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둘째에게 서운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는데, 아주머니가 몸이 안좋아서 누워있던 어느 날 둘째가 집에 오더니 "밥 줘" 라고 했단 거다. 아파서 누워있던 아주머니는 그 말이 그렇게 서러웠다고 하셨다. 솔직히 얼마나 속이 찔렸는지 모른다. 나 역시 엄마의 열가지 복잡한 상황보다 나의 단 한가지 복잡한 상황이 더 크게 느껴져서 짜증내고 상처주는 말들을 내뱉었던 적이 얼마나 많던가. 엄마도 아플 때는 서럽고, 때론 내가 밉고, 귀찮고, 또 나를 안좋아 할 수도 있는 사람인데. "너가 너 같은 딸 낳아봐야 알지" 라고 말할 땐 와닿지 않던 모든 말들이 제 3자의 이야기로 들으니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던 순간이었다.


..... 글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2편<함께를 기르는 법>은 두 개로 나누어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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