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mon Oct 06. 2016

꼭꼭 씹어읽는 에세이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를 읽고

에세이라는 장르는 제가 판단하건데 굉장히 높은 자유도를 지녔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자기의 취향을 들이부을 수 있는, 클래식으로 따지면, 제 생각엔 카덴짜(Cadenza)나 즉흥곡(Improvision)과도 같은 것입니다.


에세이의 또 하나의 매력은 작가가 얼마나 예리한 사고를 하는지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아직 내가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 어딘가 뭉툭하고, 과연 이걸 읽는 사람들이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심정으로 이 글을 썼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 반문하게 됩니다. 요점이 흐릿해지고 (사실 명확한 '주제'라는 것이 꼭 모든 글의 필수조건인지는 모르겠지만) 표현이 들쑥날쑥 날 것과 같아 아직까지도 우려가 되는 부분입니다.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선 아마, 더 늙어야겠구나, 라고 생각이 들게 만들었던 책이 황현산 선생의 <밤이 선생이다> 입니다.




문득 뉴스 기사를 보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만 보고 바로 책을 읽으러 떠났죠.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들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난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몇 번이고 다시 읽고, 공책에도 옮겨써보고, 했습니다. 당시 어떤 상황에서 이 기사를 읽게 되었는지는 비록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이러한 통시적 포용이 어떻게 인간에게서 가능할까 라는 점이었습니다.


황현산이라는 석 자의 이름은 그때서야 처음 알게 되었는데, 마치 뭐랄까, 책을 읽으면서 만난 정신적 지주가 또 한 명 생긴 기분이었습니다. (나머지 두 명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버트런드 러셀입니다.) 단 한 구절로, 사람을 이렇게 매혹시킬 수가 있구나. 실제로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으로 30여년간을 계셨다고 하니, 그 많은 문학작품을 읽고 시를 통해 세상의 많은 것들을 짧은 운율 안에 담아내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다보면 매우 당연해보이는 명제에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가령, "청춘은 왜 아름다운가?" "부지런하게 사는 것이 왜 인정받는가?"과 같은 질문들. 젊은 날의 시선에서는 사실 맞닥뜨리는 현실이 그렇지 못한 데에 대해 세상은 왜 미화하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을 이 책은 제시합니다.


젊은 날의 삶은 다른 삶을 준비하기 위한 삶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삶이기도 하며,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삶이 거기 있기도 하다. (...) 성장통과 실패담은 다르다. 두 번 다시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늘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아름답고 거룩한 일에 제힘을 다 바쳐 실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 일에 뛰어드는 것을 만류하지 않는다. 그 실패담이 제 능력을 극한까지 발휘하였다는 승리의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봄날은 허망하게 가지 않는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것들은 조금 늦어지더라도 반드시 찾아오라고 말하면서 간다.


혹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비판도 아끼지 않습니다.


판단하고 선택하기 전에 모든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가려놓은 채, 생명에 삽질을 하고 시멘트를 발라 둑을 쌓아둔다면, 거기 고이는 것은 창조하는 자의 사랑이 아니라 굴종하는 자의 증오일 것이다.


시를 쓰는 분답게 자연과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사랑하고 예찬하며,


달이 보이지 않으면 옛날 달이 떠오르던 언덕이라도 바라보며, 아파트가 들어서 그 언덕마저 없어졌으면 언덕이었던 자리라도 깊은 눈으로 바라보며 살자.


세상을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면목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고인은 이렇게 그 영욕의 자리였던 생물학적 육체의 흔적을 지상에서 지우고 싶어했으나, 역사에 걸었던 기대를 끝내 접지 않았으며, 그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래된 생각은 깊은 생각이다. 그는 역사의 깊이를 믿었다. 고인은 순간마다 한 뜻을 위해 자신의 온몸을 내던졌던 사람답게 죽음 앞에서도 전적으로 죽음에 관해서만 말했다. 처절한 결단을 향해 추호의 주저함도 없었던 고인의 유서에는 짧은 문장과 비교적 긴 문장이 어울려 만드는 단호한 리듬과 처연한 속도감이 있다. 이 다감하고 열정적이었던 사람의 절명사는, 고결한 정신과 높은 집중력에서 비롯하는 순결한 힘 아래, 우리 시대의 어느 시에서도 보기 드문 시적 전기장치를 감추고 있다. 고인의 믿었던 미래의 힘과 깊이가 그와 같다.




책 구절구절이 다소 어렵다는 사람이 많은 듯 합니다만, 빨리 읽는 책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닿는 한 문장 한 문장을 노트에 꾹꾹 눌러써보고, 그렇게 읽는 책인듯 합니다. 70여년을 살아온 분의 족적을 그렇게 빨리 따라가려고 하는 것이 어찌 보면 잘못된 생각이겠죠.


너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것. 앞으로 살면서 지켜나가야 할 생각들. 경계해야 할 것.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그런 명백하고 일목요연한 원리원칙이라기 보다는, 할아버지의 옛 이야기 그 자체. 사는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무겁지만 예리하고, 세월 속에서 편향이 생겼지만 보편타당하며, 부조리와 부당함에 용감하고 떳떳한 모습에, 정신차리게 됩니다. 잘 살아왔고, 잘 살아야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