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떠나는 날에 비는 오는가> - 산울림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꺼져있던 핸드폰을 켜니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는 시간은 밤 11시. 문자도 한 통 와 있었다.
"선생님,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시간 되실 때 연락 부탁드려요."
작년에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Y였다. 형이라고 불러도 되는데 굳이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다니, 예의 바른 건 여전하군. 그런데 밤늦은 시간에 갑자기 왜 전화 했지? 지금 시각은 새벽 한 시. 궁금증을 해소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Y가 밤 11시에 연락한 이유를 추측하며 밤잠을 뒤척여야만 했다.
'Y가 이 시간에 나에게 급하게 연락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좋은 일이라면 내일 아침에 연락해도 될 텐데 굳이 이 시간에 연락할 걸 보면 좋은 일은 아닌 것 같고,,, 내가 작년에 잘못한 게 이제 와서 터졌나?학부모 민원?업무 관련 실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만한 일은 없었는데... 가만 보자. 지금 Y가 6학년 부장이지? 작년에 내가 맡았던 아이들은 올해 5학년이니까 Y랑 엮일 일이 없는데... 설사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이 늦은 시간에 급하게 연락할 일은 아닌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Y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 한빛. 잘 지내지? 갑자기 무슨 일이야?"
"형, 저도 어제 소식을 들었는데요. 작년에 같이 근무했던 K가 세상을 떠났어요."
"어?진짜?... 20일 전에도 연락했는데... 확인된 사실 맞아?"
너무 황당하면 말문이 막힌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K는 내가 아는 한 가장 건강하고 밝은 아이였다. 늘 웃는 얼굴이었고, 단 한번도 화나거나 슬픈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불과 몇 달 후에 결혼을 앞두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저도 소식을 듣고 믿지 못했어요. 절대 그런 선택을 할 아이가 아닌데..."
선택? 대화의 뉘앙스는 사인이 자살임을 넌지시 내비치고 있었지만, 사인을 물어보면 더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아니, 사인을 알게 되면 지금 내 앞에 닥친 현실을 더 받이들이지 못할 것 같아서 사인을 물어보진 못했다.
"장례식은 언제야?"
"장례도 가족들만 모여서 조용히 치른다고 하더라고요. 작년에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들한테 전화 돌리고 조의금이라도 모아 전달하려고 연락드렸어요."
"그래, 고생이 많다. 계좌번호 보내주고, 지금 나도 경황이 없어서 나중에 또 연락할게."
전화를 마치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세상에 K가 없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해라도 하지, K가? 왜? 도대체 왜?사인이 자살이 아닌 건 아닐까?' 라는 질문이 일주일 내내 나를 괴롭혔다.
일주일 후, 마음 아플지라도 진실을 맞닥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K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후배에게 전화했다. K가 세상을 떠난 게 맞냐고. 내가 생각하는 사인으로 세상을 떠난 게 맞냐고. K는 그게 맞다고 했다. 본인들이야말로 불과 2주 전까지 송별회에서 웃으며 헤어졌던 K가 그런 선택을 한 게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전화를 통해 그나마 마음이 가벼워진 게 있다면, 자살의 원인이 우울증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래, K는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아이였는데, 내 실없는 농담에도 그렇게 잘 웃어주던 아이였는데, 그럴 리 없지.
그렇다고 슬픔이 작아진 건 아니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후회라는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K가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만한 선배가 되어주지 못한 게 끝내 마음 속 치워지지 않는 돌덩이로 남았다. 2년간 같이 지내며 K에게 잘해준 것도 있을 텐데 못해준 일들만 떠올랐다.
K와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2년은 내가 여행사 창업을 준비하던 기간이었다. 여행사 코스를 완성하고 학교 선생님 몇몇을 초대해 그 코스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K도 여행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다른 학교 전출을 앞두고 우리는 내가 짠 코스로 이별 여행을 떠났고, 낭만 뿜뿜한 하루를 보냈다. 여행 코스의 마지막은 '군산오름에서 밤하늘 보며 별멍하기' 코스였는데,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는 바람에 우리는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날 군산오름도 올라갈걸...
함께 초과근무를 했던 어느 날, 내가 좋아하는 식당에 데려가 저녁을 사준 적이 있다. 돈가스와 생선가스가 맛있는 집이었다. 그날은 왠지 안 먹어본 메뉴가 땡겨서 제육볶음을 시켰는데 제육볶음의 맛이 돈가스에 비해 별로였다. 이 집은 돈가스가 맛있으니 다음엔 돈가스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돈가스 사줄걸...
세상을 떠나기 20일 전, K가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형, 작년에 형이 데려갔던 수제 막걸릿집 있죠?거기 아직도 장사해요?"
그때가 크리스마스 즈음이었으니 여자친구랑 같이 가려나보다 생각했다.
"어, 거기? 요즘엔 장사하다 안 하다 하는 것 같더라고? 전화번호 줄 테니까 전화 한 번 해봐."
"네, 형ㅎㅎ"
이럴 줄 알았다면 그 가게에 전화해서 직접 전화번호 알려줄걸... 그게 뭐 어렵다고.
그날 이후, 영원히 대답을 듣지 못할 질문이 내게 남겨졌다. 세상을 떠나기 20일 전, 왜 K는 그 막걸리 집에 가고 싶었던 걸까?그때 이미 세상을 떠날 결심을 했고 최후의 만찬처럼 그 막걸리가 생각났던 걸까? 아니면 그때까진 별 일 없었는데, 20일 사이에 뭔가 일이 벌어졌던 걸까? 너무 궁금하지만 대답해 줄 사람은 지금 세상에 없다.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하늘도 이별을 우는데 눈물이 흐르지 않네
슬픔은 지난 이야기 아니오
두고두고 긴 눈물이 내리리니
(중략)
저물도록 긴 비가 오는가
-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산울림
가사처럼 슬픔은 지난 이야기 아니다. 두고두고 긴 눈물이 내릴테니. 요즘도 문득 K 생각이 난다. 배드민턴 동호회에서 배드민턴을 치던 학교가 K가 마지막에 근무하던 학교임을 깨달았을 때, K와 같은 학교에서 지냈던 누군가를 만났을 때, TV에서 내가 좋아하던 아티스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별일 없이 지내다가 아무 이유 없이 문득, 어느 날 문득.
그때마다 나는 K에게 묻고 싶어진다.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이었냐고, 마지막 순간에 나한테 도와달라고 연락 한 번 해보지 그랬냐고. 오늘처럼 문득 K가 떠오를 때, 내가 떠올리는 K의 얼굴에는 늘 웃음만 가득해서 '그래도 너는 살면서 힘든 순간보다는 행복했던 순간이 훨씬 많았지?' 질문을 던지며 애써 위안을 삼아보지만, 이내 물음에 대답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을 따름이다. 그렇게 널 떠올릴 때마다, 나는 늘 후회라는 감정에게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