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죠의 밤 빙수와 닌교초의 텐돈
사이타마 현에 살고 있는 친구 한주는 일어나서 티비를 켜는 것으로 출근 준비를 시작한다. 아침 뉴스 채널에 나오는 여자 아나운서들은 대체로 귀여운 편이라고 내게 소개한다. 정말 그렇다. 흐린 날을 의미하는 구름도 한 귀퉁이에 귀엽게 그려져 있다. 오전 6시 40분에 나카우라와 역에서 출발하는 신주쿠행 전철을 타기 위해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한다.
"내년에 또 보자"
2017년은 아직 더 남았지만 한주와 재회하는 건 아마 그럴 것이다. 오늘의 종착지인 닛포리 역으로 가서 무거운 짐을 코인라커에 넣어버리고 다시 가벼운 여행에 접어든다. 그 첫 번째 일정은 아라카와 강 (荒川). 작년 이 맘 때쯤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우에노행 전철을 반대 반향으로 탔다는 걸 깨닫기 전 창문에 비친 짤막한 풍경이 참 좋았다. 초록색 들판과 좁은 강, 무채색 유니폼을 입은 중학생들의 야구 경기. 일요일 정오의 평화로웠던 그 강을 월요일 아침 잠깐 걸어보려고 한다. 아카바네 역에 내려 편의점에서 따뜻한 녹차를 사서 조용한 주택가를 지나 아라카와 강까지 걷는다.
수도고속도로를 머리 위로 두고 계속 걷다 보니 어느덧 높은 건물 대신 넓은 언덕이 나온다.
아카바네 쪽 스미다 강은 아직 세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처럼 규모가 작아서 강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언덕을 넘어 아라카와 강에 도착. 신아라카와오하시야 야구장(新荒川大橋野球場)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수풀마저 왠지 더 쓸쓸해 보인다. 어제의 경기가 끝나고 남은 흔적만이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게이트볼을 즐기는 노인들의 무리도 보인다. 큰 감흥 없는 산책을 끝마치고 다시 다리를 건너 아카바네 속으로 들어간다. 그때의 강이 아름다웠던 건 활기차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 때문이었을까. 기대했던 평화로운 아라카와 강은 월요일 오전에는 없었다. 그렇게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고독한 미식가 시즌3 1화 회상씬에서 잠깐 나왔던 쁘띠몽드에 2번째 손님으로 들어선다.
과일을 주 무기로 한 디저트 메뉴가 가득한 메뉴판을 건네받는다. 플래시 라이트를 켜고 직접 촬영한 듯한 메뉴 사진들이 촌스럽기보단 조금 친숙해 보인다. 드라마처럼 후르츠 샌드를 고르고 따뜻한 커피도 함께 주문한다. 벽에 걸린 꽃 그림과 뒤편에 놓인 여자 조각상. 자녀들을 등교시키고 여기로 오는 건지 주부 손님들이 하나 둘 들어선다.
딸기와 오렌지, 멜론과 함께 생크림까지 들어간 조각 샌드위치. 거기에 알맞은 양의 커피까지. 완벽한 아침식사다. 이런 식의 후르츠 샌드는 지나치며 슬쩍 본 적은 있지만 오늘처럼 직접 먹어본 것은 처음이다. 저쪽 아카바네에선 우나동과 우롱차를 아침으로. 이쪽 아카바네에선 후르츠 샌드와 커피를 아침으로. 비슷하면서 다른 아카바네의 아침이다. 식사를 끝내고 일어선다. 기치조지 카야시마의 주방 할아버지처럼 흰색 모자를 머리에 쓴 단정한 차림의 점원이 윗 선반에서 간판과 같은 모양의 성냥갑을 내게 건네준다. 기분 좋은 식사, 기분 좋은 서비스,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
아다치구 기타센주, 무사시노시 미타카, 기타구 아카바네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쥬죠역에 도착. 목적지가 있는 쥬죠 긴자로 곧바로 들어간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점들이 많지만 다른 긴자들과 마찬가지로 분주한 발걸음이 느껴진다. 고독한 미식가 시즌2의 10화 쥬죠편에 나왔던 떡 과자 전문점 다루야마도 아직 오픈전. 우선 가볍게 오전 산책을 하자.
쥬죠 긴자 양쪽으로 주택가로 빠지는 골목들이 많다. 그중 왼쪽 길 하나를 선택한다. 조용한 월요일 오전의 평범한 시타마치(서민동네)의 풍경들. 젊은 택배기사와 주인집 할머니, 세탁소 앞에 그려진 턴테이블 그래피티, 주차장의 햇빛을 원 없이 즐기고 있는 고양이 2마리.
다시 쥬죠 긴자로 돌아가 다루야마로 돌아가 본다. 셔터를 올리고 있는 주인아주머니와 마침 눈이 마주친다. 빙수를 먹을 수 있냐고 물어보자 기계를 준비해둘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어쩔 수 없다. 이번에는 오른쪽 골목으로부터 시작하는 오전 산책을 이어간다.
이번 길은 아까보다 더 큰 공간으로 계속 이어진다. 한국에서도 익숙한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문닫힌 가게의 셔터문, 마치 새싹이 돋아난 듯 낡아버린 녹색 천막, 좁은 골목의 공연장 앞 줄지어 세워진 조화들과 간판도 없는 가게에서 판매되는 생화들. 고독한 미식가 쥬죠편에 함께 나왔던 훈제 고등어와 달콤한 계란말이를 파는 가게까지. 좁디좁은 길. 지금 이곳이 다름 아닌 쥬죠라는 것을 확연히 각인시켜주는 거리의 풍경들이다.
다시 다루야마. 이젠 아무 문제없다.
가끔 당고 같은 것을 사러 오는 손님들은 있지만 역시 가게 내부에는 나 밖에 없다. 어렵사리 드라마와 같은 밤 빙수를 주문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맛보기로 귀여운 미니 빙수가 먼저 나왔기 때문이다.
진한 밤 맛의 토핑에 뾰족한 얼음!
메인 빙수는 가격만큼이나 양도 푸짐한 편이다.
교토의 순수 얼음으로 빙수를 만드는 곳은 도쿄에서도 흔치 않다고 한다. 순수 얼음의 맛은 말하자면, 한국에서 많이 파는 눈꽃빙수가 부드러운 슈크림 빵이라면 이쪽은 튀김 고로케 정도의 식감. 날것의 느낌 그대로 거칠다. 순수 얼음은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데 실제로 다 먹을 때까지 찬 음식을 먹을 때의 띵한 느낌은 없었다. 부족함이 없는 밤 토핑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밤의 맛 그대로. 얼음과 토핑 모두 넉넉한 양이다. 놀라운 것은 빙수의 절반 정도를 먹으면 다시 밤 토핑이 나온다는 것이다.
주인 할머니보다는 어려 보이는 마스크를 쓴 중년의 여점원이 당고 몇 개를 서비스로 내어준다.
아무래도 월요일부터 이 시간에 어떻게 일본어도 잘 못하는 외국인이 여기까지 온 건지 궁금한 것 같다. 다행히 딸처럼 보이는 이 분과의 대화는 영어로 제법 잘 통한다. 한국에서 <고독한 미식가>라는 일본 드라마를 보고 거기에 나오는 음식점들만 찾아다니는 여행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4년 전에 촬영을 했었죠"
나에겐 어제처럼 선명한 드라마의 장면이 그들에게는 벌써 몇 년 전의 일화가 되어 버렸다. 다음 일정인 닌교초의 나카야마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눈치이다.
"화이팅! 고도쿠노 구루메 투어!"
<고독한 미식가> 여행기! 서울에 도착해서 이번 여행의 이름을 그렇게 짓는 게 좋겠다.
일본의 인사동. 닌교초(人形町). 오차노미즈와 같은 멋스러운 고풍 건물들이 가득한 거리를 상상했지만 막상 지상으로 올라오니 별 특징 없이 평범한 빌딩 숲처럼 보인다. 게다가 지금은 점심시간이 한참이다. 흰색 셔츠에 어두운 색의 넥타이를 한 직장인들의 행렬이 더욱 바쁜 거리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튀김 전문점 나카야마를 향해 걷는다. 대로변의 속도보다 훨씬 느린듯한 오래된 가게 앞에 곧 도착한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고 있고, 구수한 기름 냄새가 솔솔 풍긴다. 10분 정도 기다리자 내 차례가 된다.
바깥의 다소 소란스러운 분위기와 달리 가게 내부는 제법 조용한 편. 들뜬 목소리로 기다리던 여성 손님 2명과 나란히 카운터 석으로 안내받는다. 그들과 나 모두 텐동으로 주문. 곧 따뜻한 차와 오토오시가 나온다. 좁은 가게라서 당연히 좌석도 몇 개 없을 줄 알았지만 안쪽에는 4인석 테이블도 마련되어 있다. 그중에는 삼성 핸드폰으로 한국말로 통화하는 중년의 남자 손님도 보인다. 출장을 온 거라기엔 너무 익숙한 행동들이다. 청자처럼 짙은 파란색 그릇에 담긴 구로텐동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고독한 미식가> 시즌2 2화의 주인공 구로텐동! 뜨거운 흰쌀밥 위로 새우튀김 2마리와 전갱이 튀김 그리고 야채 튀김이 올라가 있다. 튀김 전문점답게 겉과 속의 적당한 바삭함이 만족스럽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는 뒤의 텐동(天丼) 보다는 구로(黒) 쪽이다. 처음 본 사람은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검은색 간장소스가 밥과 정말 잘 어울린다. 나카메구로 소카보카의 흑돼지 소금구이와 기치조지 카야시마의 나폴리탄과 함께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맛있는 것 중 하나이다!
너무 맛있어서 생각보다 서둘러 다 먹어버렸다. 배가 엄청 부르기 시작한다. 여전히 빌딩만 가득해 보이는 닌교초에서 좁고 긴 공원을 찾아 잠시 쉬기로 한다. 비둘기들이 걷다 날다를 반복하고 월요일 오후의 햇살은 그리 많이 비치지 않는다. 너무 도시적인 풍경이라 금세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만 아직 시간은 여유롭다.
닌교초에서의 예상치 못한 어수선함이 마지막 일정인 네즈에서까지 그대로 이어지게 되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이곳의 소음은 그다지 크지 않다. 상점 옆 성인의 키보다 훨씬 높게 쌓여있는 빈 박스들 사이 골목으로 들어간다. 네즈(根津)에서 센다기(千駄木)를 지나 야나기 긴자(谷中児童遊園)를 통과하여 이번 여행의 출발점이었던 닛포리역까지 스카이스캐너 시간표에 맞게 천천히 걸어서 가볼 예정이다.
이번 도쿄 여행도 구글맵의 힘으로 큰 차질 없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 네즈역에서부터 내가 앞으로 가려고 하는 길에 점선으로 표시가 되어 있다. 왠지 계속 이 선을 따라서 걷고 싶어 진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점선은 분쿄(文京) 구의 영역을 표시한 선이었다.)
가끔씩 나오는 좌측의 큰길에서는 아직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다. 조용한 주택가 사이의 길은 대부분 그늘이어서 보이는 것들의 색이 편견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좋다. 각자 유모차를 끌며 영어로 대화를 나누던 서양인들이 아기자기한 패트릭 숍의 문을 열며 고니찌와라고 인사하며 들어간다.
화려하지 않은 음식점이나 생활환경과 밀접한 형태의 술집에서 요리되어 나오는 단품 요리에서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고로가 만족하듯이, 가정집 사이 아기자기한 상점들 몇 군데로 이루어진 네즈의 평범한 거리는 나를 무척 만족시켜준다. 조용하며 평화롭다. 어느샌가 조금씩 지나쳐가던 사람들마저 전혀 보이지 않는 지점이 되자 이 세상의 소음이 단 하나도 들리지 않는 매우 이색적인 경험까지 하게 된다.
이제 이 정도의 거리라면 센다기역 즈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일본식 제과점 후쿠마루만쥬(福丸饅頭)가 보인다. 드라마에 나왔던 카린토 만쥬는 아쉽게도 품절. 비슷해 보이는 다른 만쥬를 구입해서 작은 테이블에 앉아 차와 함께 맛을 본다. 미니 빵 혹은 달지 않은 호두과자와 같은 맛. 우리 스튜디오 사람들은 공항 면세점의 대중적인 기념품보다 이런 것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같은 것으로 몇 개 주문한다.
센다기역 근처로 이어지는 거리에는 각각의 특징이 뚜렷한 상점들이 확연히 많아진다.
잠깐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와 공원 중간쯤 되는 곳의 벤치에 앉아 잠시 쉬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이런 식의 울타리 없는 작은 놀이터도 곳곳에 많았는데 지금은 아파트 단지 내에 그것을 제외하면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계속 길을 따라 앞으로 걷는다. 이제 골목의 폭이 더 좁아져 양 옆의 사물들이 더욱 가깝고 친근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한 집 문 앞에는 비닐우산이 무려 30개가 놓여 있다. 건망증이 심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이제 친절했던 네즈의 점선(분쿄구의 경계선)이 끝나고 닛포리역으로 이어지는 야나카 긴자로 들어간다. 3대 긴자라고 하더니 서양인들이 꽤 많이 보인다. 아마 단체 관광코스로 여길 왔나 보다. 이번 여행에서 쇼핑은 하지 않는다. 대신 배를 넉넉하게 채운다. 야나카 긴자 일단 통과.
노란 햇빛이 끝까지 길어질 때까지 여행이 이어지고 있다. 목에 이름표까지 하고 벽 귀퉁이에 얌전히 앉아 있는 고양이의 뒷모습이 마지막 기억으로 좋을 것 같다. 이제 사무적인 일들만 남는다. 이동과 기다림. 완전한 밤. 그리고 휴식. 하지만 이런 것들은 당분간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월요일의 오전과 오후.
그리고 3일간의 <고독한 미식가> 여행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