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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 DISPLAY Jan 09. 2018

<고독한 미식가> 여행기 4/5

기치조지의 나폴리탄과 사기노미야의 로스마늘구이


기치조지의 함박스테이크와 나폴리탄


이노가시라 공원의 나름대로 한적한 여유가 끝나고 사람들과 차들이 다시 많아지는 시점에 이른다. 기치조지(吉祥寺). 역 주변은 미타카, 기타센주와 마찬가지로 백화점으로 둘러쌓여 있다. 감상은 일단 나중으로 미룬다. 아름다운 푸른 호수에 매료되어 계획보다 일정이 조금 늦쳐졌기 때문이다. 정면 방향으로만 계속 가면 되니까 찾아가는 길은 쉽다. 횡단보도를 몇 번이나 건넌다. 그런데 땅값 비싸보이는 대로변에 그 가게가 정말 있는 걸까.


カヤシマ (카야시마)


정말 있다. 비프 스테이크를 주문하면 무늬가 없는 넓은 흰색 접시에 스프부터 나오는 90년대 경양식 레스토랑의 모습을 한 카야시마가 정말 있다. <고독한 미식가> 시즌 1 7화에서 본 모습 그대로이다. 창가에서 두번째 테이블에 앉아 고민 없이 와쿠와쿠세트(카레라이스, 오므라이스, 필라프, 나폴리탄 중 1가지 메뉴와 포크진저, 함박스테이크, 소세지, 슈마이 중 1가지 메뉴의 조합으로 세트를 구성할 수 있다.)로 주문한다. 드라마에서처럼 나폴리탄과 함바그를 고르고, 커피는 왠지 맛이 없을 것 같아 아이스 홍차로 선택. 살짝 벌어진 커텐 사이로 보이는 주방에선, 단정한 요리사 차림을 한 마른 체형의 아저씨가 후라이팬 여러개를 뒤집으며 오가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미소만은 여전히 잃지 않고 있다. 메뉴가 나오는데 조금 오래 걸린다.


ワクワクセット(두근두근 세트) - ハンバーグ(함박스테이크), ナポリタン(나폴리탄), アイス 紅茶(아이스 홍차)


왜 이 세트에 포함되어 있는건지 좀처럼 이해 되지 않는 된장국까지 모든 메뉴가 한번에 나온다. 좁은 1인석 테이블이 가득 차버린다. 이번 <고독한 미식가> 도쿄 여행 중 가장 기대되는 곳을 꼽으라면, 나카메구로 소카보카의 흑돼지 소금구이와 닌교초 나카야마의 구로텐동 그리고 기치조지 카야시마의 나폴리탄이다. 그 중에서 드라마를 보는 순간부터 가장 기대되었던 것은 바로 이 나폴리탄. 사실 나폴리탄은 일본의 평범한 가정식 요리이다. 넓게 자른 피망의 식감과 두툼한 베이컨도 좋지만, 토마토 스파게티처럼 시큼거리지 않는 달짝지근한 케쳡의 맛이 역시 가장 좋다. 초등학교 때까지 살던 집의 식탁보와 의자의 감촉이 떠오르는 추억의 맛이다.


주먹보다 작은 함박스테이크는 슈퍼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시큼달달한 돈까스 소스를 썼나보다. 이것도 나름대로 추억의 맛인셈. 조금 찐득한 드레싱 소스가 뿌려져 있는 샐러드도 부담없이 잘 어울린다.


아까 자리에 앉을때부터 적극적인 시선을 보내던 왼쪽 테이블의 할머니가 본격적으로 말을 건내기 시작한다. 너는 캐논 카메라를 쓰는구나. 어디서 왔고 몇 살이니? 네 저는 한국에서 왔고 32살입니다.


"카와이"

"네?"

"카와이데스"


엄마가 해주는 심심한 집밥보다는 톡 쏘는 콜라와 100원에 4개 하는 떡볶이에 행복하던 시절, 해맑은 소년의 얼굴이 아직은 조금 남은걸까. 잊고 있던 그 미소처럼 반갑고 그리운 말이다. 마지막으로 건넨 악수까지 기분 좋게 받고 밖으로 나온다. 다시 2017년 오후 2시. 본격적인 기치조지 산책 시작이다.










기치조지, 상점가 혹은 주택가 혹은 아케이드


기치조지 혹은 키치조지 혹은 키치조치. 아무튼 복잡한 큰 길을 벗어나 서쪽의 골목 안으로 들어서니까 듣던대로 아기자기한 상점과 카페들이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자면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 무늬의 패브릭 숍이라던지 파스텔 톤의 작은 소품을 파는 가게, 혹은 커스텀 가능한 컨버스 매장말이다. 그런데 무언가를 구입하려고 고민하는 행동은 이번 여행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것 같다. 쇼핑에 대한 생각을 아예 접어버리니까 다시 조용한 주택가로 발걸음이 향한다. 그래도 아까의 상점가에 미련이 조금 남는다.



상점가와 주택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게 좋지 않을까.

어디를 가야하나.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산책을 시작한 지점으로 돌아와버린다.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역 주위의 백화점 몇 곳을 지나 기치조지 선로드 상점가까지 걷는다. 상점가에서 주택가로. 다시 아케이드 상점가로. 제대로 기치조지를 즐기고 있는 걸까.



드라마에서 고로상이 멘치카츠를 구입했던 정육점 사토우 미트숍도 보인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반대편 길에 닿을 정도의 인기는 그 범위 밖이다. 정육점에서 파는 멘치카츠, 그 이름만으로도 믿음직스럽다.



기치조지의 동쪽으로 걸어간다. 철길은 수평으로 이어져 있고 도로는 대각선으로 기울어져있다. 가로와 세로의 길을 적당히 번갈아가며 평화롭기까지한 일요일 오후의 한적한 주택가를 걷는다. 햇빛은 여전히 강하지만 그늘에서 마주한 초록색의 식물들은 카메라 뷰파인더로 보아도 부담이 없다.



이 정도면 기치조지는 끝났다고 보는게 맞는 것 같다. 이제부터는 니시오기쿠보 구간.


本田東公園(Honda Higashi Park)









잠시 니시오기쿠보


이제부터는 <고독한 미식가> 여행과는 상관없는 니시오기쿠보(西荻窪) 구간. 미타카-기치조지-니시오기쿠보-오기쿠보로 이어지는 코스는 도쿄 중심부에서 벗어난 서쪽 도쿄도의 한적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고 도보로도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계획한 일정이다. 다만 오기쿠보까지는 무리일 것 같아 니시오기쿠보 정도만 잠시 걸어보려한다.



기치조지에서부터 걸어온 길이 바로 역 앞까지 이어지지 않아서 그런지 도쿄의 여느 역과는 다른 분위기처럼 보인다. 노상 주점과 다름없는 술집의 야외테이블에는 벌써부터 술고래 무리들이 보인다. 아까 아카바네에선 아침부터 술 마시는 일본인들을 봤는데 뭐 이정도야.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은 좁고 허름한 술집 골목에서는 꺼진 간판 아래 분주한 인기척이 느껴진다. 니시오기쿠보에선 간단하게 디저트 하나를 먹자.


シングル(싱글콘 아이스크림 우유맛)


보보리 아이스크림(BOBORi). 어째서 i만 소문자인걸까. 기치한 간판의 느낌을 보며 상상한 것보다는 덜 달콤하고 건강한 우유의 맛이다. 사기노미야에서의 저녁 시간까지 니시오기쿠보를 걷자.



남쪽으로 이어진 좁은 길 가득히 사람들의 왕래가 잦다. 이래서야 원. 안가볼 수가 없다.



오랜 정취를 풍기는 남루한 술집이 많았던 역 앞의 느낌과 다르게 니시오기쿠보의 남쪽 상점가는 어떤 면에서 세련된, 유쾌한 숍들이 많다. 진부하지 않은 색이나 유쾌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한 포스터들이 그런 거리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소박한 크기의 둥근 창 안으로 살짝 보이는 연보랏빛 커튼은 다름 아닌 아닌 사립병원의 것이다. 대체로 이런식의 분위기.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역시 해가 지기 시작한다. 완전한 밤이 되기전에 다시 <고독한 미식가> 여행기로 돌아가야한다. JR 소부센을 타고 몇 정거장 앞의 아사가야로 이동 후 사기노미야행 버스를 탄다.










사기노미야의 로스카츠, 로스마늘구이


버스 노선은 구글맵보다 아사가야 행인의 정보가 더 정확했다. 01번이 아닌 22번 버스로 무사히 사기노미야(鷺ノ宮)에 도착. 해가 지는 방향으로 얄미울 정도로 구름이 가득하다. 한 낮에 그렇게 찾았을 때는 나타나지도 않더니. 이제 일본의 철길은 제법 익숙한 것 중 하나이지만, 아직 남아있는 하늘의 보랏빛을 배경으로 오렌지 색 가로등을 조명삼아 보면 여전히 매혹적인 풍경이 된다.



오늘의 2번째 하이라이트, 미야코야의 저녁 영업이 시작될 때까지 푸르스름한 사기노미야에 익숙해지기로 한다. 5시 20여분 정도, 불이 꺼진 미야코야에 도착해서 잠자코 기다리는 순간 딱- 하고 노란 불이 들어온다. 무뚝뚝하지만 친철해보이는 배가 많이 나온 할아버지가 안으로 안내한다.


とんかつ みやこや(미야코야)


이번에도 가게에 손님은 나뿐이다. 스모 채널이 켜진채 음소거 되어 있다. 조용하고 깨끗한 실내. ㄱ자로 꺽인 닷지석이 전부인줄 알았지만 가게 안쪽에는 4인석 테이블까지 있다. 조금 무리해서 메뉴 2개를 고르기로 한다. 로스까스 정식과 로스마늘구이. 메뉴당 오토오시 1개가 규칙인가 보다. 같은 오토오시가 2개나 놓여있으니 조금 우스운 모양새가 된다.


ロースにんにく焼き (로스마늘구이)


밥이 없는 로스마늘구이가 먼저 나온다. 어제 타이레스토랑의 공심채볶음처럼 진한 직화의 맛이다. 강한 마늘의 맛! 흰쌀밥이 아니라면 맥주라도 꼭 필요한 요리다. 다행히 로스까스 정식엔 밥이 있다.


ロースかつ定食 (로스카츠 정식)


주메뉴가 구이냐 튀김이냐가 다른뿐 양배추와 마카로니 샐러드의 구성, 심지어 그릇의 무늬와 크기까지 동일하다. 이 그릇들의 2/3 크기만한 넉넉한 쌀밥까지 등장하니 풍만한 저녁식사가 되어버린다. 소스를 양배추 옆에 붓고 로스카츠 한점을 든다. 비계까지 들어간 돈카츠의 모습이 덜익숙하지만 튀김과 소스가 정말 완벽하다. 왼손으로 밥그릇을 집어들고 양쪽의 메뉴들을 오가며 먹기로 한다. 이것 저것 생각할 것 없이 먹는 행위에만 집중한다. 여기까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드는 즐거운 경험이다.


혹시 아직 배에 여유가 남을 경우를 대비해서 알아봐둔 누마부쿠로의 와사비갈비는 깨끗하게 포기. 사기노미야 역까지 걷는 동안 어디로 갈지 생각해봐야겠다.









시부야에서 쇼핑을 하고 사이타마로 넘어가는게 좋겠다. 필요한 쇼핑 리스트도 미리 마련해두었다.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는 언제나 활기차다. 6년 전에도, 작년의 일요일 그리고 오늘도. 시부야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하면 당장에 내어줄 것처럼 재빠르고 포만감이 넘쳐 보인다. 후랑 후랑, 도큐 핸즈, 돈키호테 같은 익숙한 쇼핑점부터 캔 두 같은 천원샵까지 신속하게 쇼핑을 마친다. 여행 중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난 것 같다. 즉시 피곤함이 몰려온다. 퇴근 후 한국어 과외까지 끝맞친 한주와 나카우라와 역에서 9시 반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는다. 여차하면 츠타야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더 보낼수도 있지만 내일도 재미있는 일정이 많이 남아서 이 정도로 마무리하기로. 시부야. 내년에 보자.


ラーメン(라멘)


나카우라와 도착. 한주는 아직 저녁도 못먹은 상태다. 세탁소와 같은 편의 시설이 없어 조금 불편한 니시보리에서 그나마 마음에 드는 건 집에서 가까운 이 라멘집이라며 데리고 온 한주. 하는 수 없이 나도 기본 라멘을 하나 주문한다. 한주는 차슈를 추가해서 밥까지 선택한다. 차슈는 역시 맛있지만 국물이 이치란 라멘처럼 진하진 않다. 테이블 마다 하나씩 걸려있는 부채가 매우 이색적이다.


밥 먹고 자주 산보하러 간다는 공원으로 가자고 한다. 작년 공사장 같은 작은 공원인줄 알고 으례 코웃음 쳤지만 이렇게 넓고 멋진 공원이 갑자기 나오다니! 이번 여행에서 가장 놀라운 순간 중 하나다.


さいたま市営別所沼公園 Saitama Shiei Besshonuma Park (벳쇼누마공원)


이 엄청난 호수공원에 연이어 감탄한다. 이 규모! 이 분위기! 5~6층 높이의 키 큰 나무들 주위로 걷기 편한 트랙이 둘러싸고 있다. 시부야에서 부터 집어넣은 카메라를 다시 꺼낼 수 밖에 없다.

"밤이라 멋진거야. 낮에는 또 그렇지 않아"


일요일 오후의 기치조치와 니시오기쿠보 그리고 저녁과 밤의 사기노미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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