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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권 Apr 21. 2021

2021-04-18 괴물은 그림자에서도 괴물을 보고

'내가 괴물이 되어가는 것 같아.'


뜬금없이 오랜만에 연락해서 너는 심리학과지 않냐며 다짜고짜 고민 상담을 하던 X는 이야기했다.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서 동시에 여러 명을 만나는 것으로 자존감을 충족시키고자 했는데, 바람을 피우니까 상대방 또한 언제든지 나를 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여러 명을 만나게 된다고. 그런데 지금 만나기 시작한 이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이 사람에게 내가 불안해서 여러 명의 연인들을 동시에 만나온 과거(이자 현재)의 상처를 드러내야 할 것 같냐고. X는 내게 물었다.


X의 의도는 다분히 답이 정해져 있었고 그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X가 온전히 중심을 잡기를 바랐다. 학창 시절의 X는, 지금의 X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그가 예전의 선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래서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닐 거라고. 다 정리하고 마음을 차분하게 해야, 네가 행복하고 네 마음의 평온함을 찾을 것이라고 길게 진심을 눌러 담아 긴 편지를 써서 보냈다.


X는 읽고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잠수.


그렇게 잠수를 타고 몇 주 뒤, X는 밑도 끝도 없고 안부인사도 없이 자기도 이리저리 심리학 지식을 찾아보고 고민해봤다며, 모든 사람에게는 페르소나가 여럿 존재하고, 이 모든 페르소나를 밝힐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냐고 내게 물었다. X가 내가 바람피운 사람을 만나서 크게 힘들어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런 말로 합리화를 뜯어내려는 것에, 나는 '나는 너의 이야기가 나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킴에도 진심을 담아 조언을 했는데, 너는 이런 이야기를 듣는 나의 진심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나를 감정 쓰레기통 취급하고 있으니... 네가 바라는 답을 해줄 사람에게 시간과 마음을 쓰고 나는 이제 네게 나의 진심과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라고 담담히 이야기했다. 너의 행동은, 너만 생각하는 방식이며 그 방식이 나의 마음에, 타인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너는 단 한순간도 고민한 적 없다고.


X는 횡설수설하며 자신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아야 친해진다고 생각했다며, 우리가 안 친해서 이런 고민을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둥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친한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었는데 마침 심리학과인 네가 생각나서 이야기한 것이라고. '네가 불안해하듯 네가 이미 괴물이 된 것 같다'라고, 나는 차마 이야기하지 못하고 담담하게 네가 몸도 마음도 건강해져서 잘 지내길 바란다며 이야기를 마쳤다.


잊고 있던 이 몇 년 전의 대화는 몇 달 전에 X가 내게 SNS 이웃을 신청하면서 다시금 기억이 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X는 본인의 연인이 환승 이별을 당해서 자신이 이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SNS를 시작했음을 공표하고 있었다.


X는 아직도 타인의 그림자에서도 괴물을 볼까.

X는 자신이 동시에 만난 사람들에게 한 번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가졌을까. 자신이 상처 준 것에 사과는 하고 자신의 환승 이별에 대해서 피해자로서 위로받기 바라는 걸까.


괴물을 품은 자는 자신이 괴물을 품었기에 상대방도 괴물을 품었으리라 생각하고 더 추하고 불안한 존재가 된다. 거짓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을 타인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믿기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뒤틀리게 되는 악순환에 빠져서. 'Everybody lies.' 미드의 닥터 하우스에게, 닥터 윌슨은 그래서 네가 miserable 한 삶을 사는 것 아니냐고 소리친다. 너는 네 자신도, 타인도 믿을 수 없이 꼬여버렸다고.



뒤틀린 군주론. 왜 적을 대하듯 친구를 대하고 친구를 대하듯 적을 대할까.

거짓의 낯빛과 진심은 언젠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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