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바랑녘
“응? 나? 혼자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하얀, 조금 쉬었다 가자. 서쪽으로 갈수록 바람이 건조해져서 구름을 건너기 많이 힘들어질 거야.”
구름 조각을 중간에 멈춰 선 토모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고, 거친 호흡은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토모는 숨이 찬 와중에도 뒤에 놓고 온 구름 조각들을 모아 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헥헥, 생각보다 엄청나게 멀어요, 토모 형. 다른 곳도 다 이렇게 먼 거예요?”
“그래도 서쪽 바랑녘이 초롱골에서 그나마 가까운 편이야. 바퉁 아저씨가 있는 북쪽 어릉망까지는 두 배는 더 가야 하는 걸. 바퉁 아저씨 성격이 그렇게 괴팍한 데는 이유가 다 있다니까.”
이내 구름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운 토모가 툴툴거렸다. 하얀도 토모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자신이 지나온 동쪽 초롱골의 광경이 하얀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롱골 아래를 드넓게 메웠던 평원과 숲들이 이제는 조막만 하게 보였다. 서쪽으로 올수록 나무들은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푸르던 평원의 수풀은 점차 뾰족한 가시를 가진 나무들과 특이하게 생긴 바위와 돌 그리고 수없이 많은 모래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하였다.
“세상은 정말 크고 넓네요! 서쪽으로 갈수록 바람이 말라가고 있어요. 구름 아래도 초롱골과는 색깔이 전혀 달라졌어요! 저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글쎄, 난 별로 관심 가져 본 적은 없어서 말야. 구름 위의 일로도 충분히 재미있고 바쁜걸. 구름 밑에 일에는 관심도 두지 말고 궁금해하지도 마. 특히 바퉁 아저씨 앞에서는 말이야.”
토모는 나름 근엄한 표정으로 엄하게 말하였지만, 앳된 목소리를 감출 수는 없었다. 느닷없이 나온 바퉁의 이름에 하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퉁 아저씨요? 왜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 아냐. 신경 쓰지 마.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줄게. 그나저나 모모 할머니는 좀 괜찮아지셨으려나 모르겠네.”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는 토모의 모습에 하얀은 고개를 반대쪽으로 한 번 더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얀은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대신 말이 나온 김에 모모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토모 형, 모모 할머니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 주세요!”
“모모 할머니? 좋아. 가면서 모모 할머니 이야기를 해줄게.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는걸.”
누워있던 토모는 벌떡 일어나서 짧은 팔과 목을 돌리며 몸을 풀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본 하얀도 토모를 따라서 팔과 목을 부지런히 돌리기 시작하였는데, 만일 지나가 이 광경을 봤다면 미소가 귀까지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부터는 조심해서 가야 해. 서쪽 바랑녘은 구름들이 정말 없거든. 간혹 불어오는 구름도 작고 얇아서 발 딛기도 힘들고 너무 흩어져 있어서 모으기도 쉽지 않아. 그래서 구름 일이 별로 없다고 해야 하는 건지, 까다롭다고 해야 하는 건지 조금 헷갈리기도 해. 심술쟁이 피오 형은 분명 힘들다고 하겠지만 말야.”
토모의 은근한 경고가 섞인 설명에 하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굳게 쥐어진 두 주먹에는 사뭇 비장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저기 하얀. 그렇게 긴장하지는 않아도 되는데...”
이미 하얀의 귀에 토모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두 꼬마 쿠릉은 다시 손과 발을 부지런히 놀려 서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반나절을 쉬지 않고 더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데, 하늘에서 구름은 찾아보기가 더욱 힘들어졌고, 구름 아래는 황금색 모래만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초롱골에서 한 움큼 챙겨 온 구름 덩어리도 이제는 십 분의 일도 남지 않았고, 색도 점차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멈춰 선 토모가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어, 이쯤이 맞을 텐데? 아닌가?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구름조차 버티기 힘든 건조한 바람 속이었으나 왜인지 모르게 토모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얀이 조심스럽게 살며시 물어보았다.
“토모 형, 서쪽 바랑녘에는 이번에 몇 번째 오는 거예요?”
“응? 나? 혼자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하얀의 목덜미 뒤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린 순간이었다.
“하하하.”
“하하하.”
“하하...”
“하하...거, 걱정 마!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길을 못 찾아서 구름에서 떨어진 쿠릉이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걸!”
“토모 형...떨어져서 아무도 모른 게 아닐까요...”
그 사이에도 두 쿠릉이 딛고 있는 구름 덩어리는 서쪽 바랑녘의 마른바람에 점점 사그라들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두 꼬마 쿠릉은 다급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 모모 할머니! 어디 계세요! 저 토모에요! 모모 할머니! 살려주세요!”
“모모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하얀이라고 해요! 어디 계셔요! 보고 싶어요!”
“쿠릉 살려! 여기 쿠릉 있어요!”
그렇게 십여 분 동안 주변을 돌아다니며 두 꼬마 쿠릉은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고요한 하늘 아래 사막에서 바람과 모래 구르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딛고 있던 구름 덩어리는 이제 덩어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작아졌고, 토모와 하얀은 점점 좁아지는 구름 위에서 서로 등을 맞대고 두 손을 꼭 잡고 서있는 수밖에 없었다. 온 하늘에는 구름 한 조각과 겁먹은 두 꼬마 쿠릉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내 토모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울먹이기 시작하였다.
“하얀, 정말 미안해. 내가 바보야. 내가 너를 위험에 빠트렸어...”
“토모 형...”
토모의 말이 장난이 아님을 느낀 하얀의 뽀얀 얼굴은 더욱더 하얗게 질려갔고, 구름 조각이 점점 작아질 때마다 하얀의 눈망울도 촉촉하게 젖어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한두 방울씩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들썩이는 하얀의 어깨를 느낀 토모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터트리며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하얀도 덩달아 엉엉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꼬마 쿠릉이 서로 얼싸안아 한참을 울음을 터트렸는데, 그러는 동안 서쪽에서 구름 조각들이 하나둘 떠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위를 한 쿠능이 폴짝이며 다가왔다.
“얼씨구나. 너희 뭐 하냐?”
두 꼬마 쿠릉의 뿌연 눈동자 속에 삐딱한 자세로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쿠릉의 모습의 비쳤다.
“으아앙, 피오 형이다!”
“흐앙, 피오 형! 우리 구하러 와줬구나!!”
토모와 하얀은 냅다 피오의 구름으로 뛰어 넘어가 피오의 다리를 하나씩 부둥켜안고, 남겨놓은 눈물마저 모두 쏟아내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야, 도저히 시끄러워서 낮잠을 못 자겠어서 왔다. 어휴 시끄러워. 그만 좀 울어, 이 꼬맹이들아! 아이 콧물 묻잖아. 좀 떨어져 봐!”
피오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꼬마 쿠릉은 피오의 다리를 붙잡고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그래, 이 꼬맹이들. 이제 좀 진정이 되냐?”
여전히 한심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피오의 말에 눈물을 그친 토모가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운 하얀은 그저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헤헤, 고마워. 피오 형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정말 감사해요, 피오 형! 생명의 은인이셔요!”
피오가 이제는 거의 형체도 남지 않은 토모와 하얀의 구름 조각을 마저 거두고는 말했다
.
“토모, 너 지나한테 못 배웠어? 서쪽 바랑녘은 한 번에 지나면 안 된다는 거? 이 건조한 바람에 구름이 퍽이나 남아나겠다. 나 참. 간만에 호른을 떠나는 쿠릉을 볼 뻔했네. 아주 좋은 구경이었을 텐데 아쉽다 아쉬워.”
피오의 잔소리에 토모의 입이 기다랗게 늘어선 구름 징검다리 마냥 튀어나왔다. 둘의 눈치를 보던 하얀이 피오의 말이 끝나자 슬금슬금 토모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토모 형, 호른이 뭐에요?”
“꼬맹이 하얀, 다 들린다. 너희처럼 맹한 쿠릉들이 구름을 모두 잃고 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말해. 100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아주 대단한 일이지.”
순간 토모와 하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는데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순식간에 귀까지 새빨개졌다. 싱글벙글한 피오의 얼굴에 토모는 질색하며 말했다.
“으으. 그만, 그만! 하필 왜 피오 형이야! 이거 30년은 놀려먹을 거라구!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해.”
“걱정 마라, 꼬맹이 토모. 50년은 거뜬히 놀려먹어 줄 테니까. 그나저나 모모 할멈에게 가려는 길이었지? 내가 데려다 주마. 이렇게 좋은 구경을 했는데 그 정도는 서비스로 해줄 수 있지. 자, 가자.”
피식 웃은 피오가 구름을 나눠 밀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말없이 성큼성큼 구름을 뛰어넘어 갔고, 그 뒤를 두 꼬마 쿠릉이 뒤떨어질라 부지런히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려 따라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