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뭐부터 해야 하더라...?
하얀은 일어나서 싱그러운 미소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중심으로 많은 쿠릉들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본 하얀은 조금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다 저를 보러 오신 건가요? 이거 부끄럽네요...헤...”
그 말을 들은 주변의 쿠릉들은 누구라도 먼저 말을 시작하기를 기다리며 서로를 힐끗거리며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바퉁으로 모아지던 그때, 바퉁이 헛기침을 한 번 내뱉더니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반갑구나, 초롱골의 새로운 꼬마 쿠릉. 내 이름은 바퉁이라고 한다. 저 북쪽 어름달에 지내고 있지. 네 이름이 하얀이라고?”
“네, 반갑습니다. 바퉁. 제 이름은 하얀이에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지나도 한 발 앞으로 나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얀에게 대답했다.
“우리 쿠릉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을 갖고 태어나요.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아주 자연스러운 거지요. 반가워요, 하얀. 내 이름은 지나라고 해요. 동쪽 구릉에서 지내고 있지요”
“반가워요 지나. 정말 미소가 우아하시네요!”
하얀의 대답에 지나의 미소가 한껏 더 깊어져 보였다. 이내 지나는 누구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토모는 어디 숨은 거야? 가장 먼저 인사할 거라고 그렇게 신나 있더니?”
그때, 언제 숨었는지 구름 바닥 속에서 토모의 머리가 쏙 하고 솟아났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꽤나 멋쩍은 표정이었다.
“헤헤, 아니. 그래도 모모 할머니 다음으로 바퉁이 어른이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도 순서란 걸 안다구요!”
머리만 빼든 토모의 너스레에 주변으로 웃음이 퍼졌다. 그새를 못 참고 피오가 한 마디를 더했다.
“순서를 아는 게 아니라 말 걸기 부끄러웠던 거겠지.”
피오의 말에 토모의 입이 댓발 나왔지만, 할 말을 순간 못 찾은 것인지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이내 토모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는 하얀을 바라보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 하얀! 나는 토모라고 해! 지나와 같이 동쪽 구릉에서 지내고 있어! 나는 하얀보다 두 계절 일찍 태어났으니까, 토모 형이라고 불러도 좋아. 하하!”
그 말을 들은 요요가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분명 아까는 친구라더니...”
토모는 요요의 궁시렁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참아냈던 말들을 터트려내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 나 이번에 아후를 보는 게 처음이야.”
“정말 대단했어! 너무너무 이쁜 빛과 강한 바람이 불었다고. 너도 그걸 봤어야 했는데.”
“하얀 너 정말 하얗구나. 그래서 이름도 하얀인가봐.”
“키는 내가 조금 더 큰 것 같아! 이 정도면 형으로서 자격이 있지!”
“정말 정말 신난다 하얀. 너에게 소개하고 보여줄 것들이 정말 많아!”
끝이 없이 이어지는 토모의 말에 주변 쿠릉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내저었고, 바퉁은 갑자기 두통이 오는지 한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를 뿐이었다.
“토모, 토모! 그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얀은 까르르 웃을 뿐이었다. 토모를 향해 소리를 지른 바퉁이 한숨을 잠시 내쉬고는 토모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서둘러 말하였다.
“하얀아, 미안하구나. 이 시끄러운 꼬맹이가 네 형 행세를 하기 시작하면 꽤 피곤해질 거야. 이해하렴.”
“걱정 마셔요 바퉁, 이렇게 멋진 형이 생긴다니 저는 너무 좋은걸요!”
“어린 녀석이 속도 좋구나. 너무 물들지는 말거라. 저렇게 시끄러운 건 토모 하나로도 충분하니까”
하얀은 조용히 웃으며 바퉁만 볼 수 있도록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바퉁은 그 모습을 보더니 이제 초롱골 걱정은 덜었구먼. 하고 중얼거렸다.
“지나, 동쪽. 바람. 온다.”
무리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구석에서 한 쿠릉이 귀를 까닥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지나도 바람을 느껴보려는 듯 손도 올려보고 귀도 까닥이었지만, 도통 느낄 수가 없었는지 몇 번을 더 시도해 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매번 어떻게 느끼는 건지 대단해요. 미누가 그렇다면 틀림없겠죠. 전 먼저 가봐야겠네요. 곧 구름들이 떠내려 올 거예요. 매번 고마워요, 미누”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토모의 고개가 지나 쪽으로 홱 하고 돌아갔다. 토모의 눈에는 왜인지 알법한 간절함이 반짝반짝 가득했다. 지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토모, 걱정 마렴. 아직 큰 바람은 아닌 것 같으니 혼자 정리할 수 있을 거야. 한동안 하얀이가 초롱골에 정착하는데 네가 도와주고 오렴. 할 수 있겠지?”
“물론이죠! 지나. 제가 형으로써 책임지고 안내할게요! 구름 일은 다음 번에 두 배로 할 거예요!”
씩씩한 토모의 목소리를 뒤로 피오가 중얼거렸다.
“그러면 내 구름 일도 좀 해주지. 아, 너무 하기 싫은걸.”
그 말을 들은 바퉁이 엄한 표정으로 피오를 바라보았다.
“피오. 평소에도 몸 불편한 모모 할멈이 네 일을 도와주는 걸 모를 줄 아느냐. 오히려 도와드릴 생각은 못 할망정 구름 일을 조금씩 떠넘겨! 구름 일을 싫어하는 쿠릉이라니, 쿠릉으로써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네네, 알겠다구요. 거참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이놈이 그래도!”
피오도 화가 난 바퉁은 무서운지 차마 마주 보지는 못하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면서 쿠릉들 사이로 숨어들면서 말하였다
“그래도 바람이 한동안 없어서 구름 일도 별로 없었다구요. 모모 할머니도 편히 쉬고 계셔요. 덕분에 오늘은 휴식입니다~!”
그때, 다시 귀를 까닥이던 미누가 순간 미소가 스친 듯 아닌 듯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쿠릉들 사이로 숨어버린 피오를 바라보았다. 숨어있던 피오도 그 시선을 느끼고 미누를 바라보았는데, 순간 안 좋은 예감이 느껴지는 듯하였다.
“설마..?”
“피오, 서쪽. 큰바람. 간다.”
언제 숨어들었냐는 듯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온 피오가 털썩 무릎까지 꿇고는 절규했다.
“으아아! 말이 씨가 된다더니! 오늘은 쉬려 했다고! 종일 뒹굴뒹굴하려고 어제 구름 침대도 만들어놨단 말이야!! 미누! 거짓말이지! 나 놀리려는 거지??”
미누는 무표정한 표정 속에 눈을 부릅떴다.
“미누. 거짓말. 안 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나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멀리서라도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외롭지는 않네요. 피오, 큰바람이라니 얼른 돌아가야겠어요? 이번에 모모 할머니 지역도 정리하는 거 꼭 까먹지 말구요.”
지나는 몸을 돌려 하얀을 바라보았다.
“하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바람이 오고 있다고 해서 먼저 가야겠어요. 미안해요. 다음에 꼭 동쪽 구릉으로 놀러 오세요. 멋진 곳이랍니다.”
“구름 일이라니...새로 배울 게 많네요! 환영해줘서 감사해요, 지나. 곧 토모 형이랑 같이 놀러 갈게요!”
그 대화를 듣던 토모가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남몰래 중얼거렸다.
“형이라...불러줬다...”
지나는 오랜만에 본 쿠릉들과도 돌아가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애초에 모여있는 쿠릉들이 많지 않았기에 금방 인사를 끝낸 지나는 초롱골에 올 때 딛고 온 구름들을 밀어놓고 사뿐히 뛰어올랐다. 지나의 손짓 하나하나에 구름들이 조각나고 밀려나고 당겨오기 시작하였고, 구름으로 징검다리를 멀리멀리 만들어 사뿐히 뛰어넘으며 동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쿠릉은 구름과 같이 가볍기에 높게 그리고 오래 공중을 노닐 수 있지만, 새와 같이 날아다니는 것은 아니기에 중간중간 발을 딛는 구름이 있어야 했다. 이 때문에 구름을 재단하고 다루는 것은 어찌 보면 쿠릉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손짓 몇 번에 근사한 구름 조각들을 연이어 줄을 지었고, 지나는 그 위로 초롱골에서 단숨에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토모는 지나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동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바퉁이 피오를 향해 말했다.
“피오, 너도 얼른 떠날 준비를 하거라. 미누가 큰 바람이라고 할 정도면 일이 상당하겠구나.”
이미 어깨가 처질만큼 처진 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얀을 바라보았다.
“꼬마 하얀. 난리 통에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 나는 피오야. 나중에 서쪽 바랑녘에 오면 보자. 나는 일하러 가야해...”
“안녕하세요, 피오! 제가 아직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힘내세요! 응원할게요!”
“응원 같은 건 도움 안 돼...”
지나와 다르게 피오는 인사도 없이 터벅터벅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힘이 없어 보였지만 쿠릉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바퉁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우리 꼬마 쿠릉과 인사할 사람들은 마저 하고, 얼른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자고.”
바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쿠릉들이 하얀에게 몰려들었다. 조용하던 미누와 겁 많던 요요도 이 특별한 날에는 평소와 다르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하얀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하나씩 인사를 끝낸 쿠릉들은 자신이 몰고 온 구름들을 가지고 하나, 둘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자리에 남은 쿠릉은 바퉁과 토모, 그리고 하얀뿐이었다.
“토모, 한동안은 초롱골에 남아서 하얀을 도와줘야겠다. 네가 처음 태어났을 때 지나가 해준 거 기억나지? 잊지 말고 천천히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 된다. 알았지?”
“바퉁, 너무 걱정이 많으신 거 아니에요? 저 토모라구요!”
“그래서 걱정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하는 거냐, 이 시끄러운 꼬맹아.”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토모의 입이 재차 댓 발 나왔지만, 아까피오 때와 마찬가지로 별 대꾸를 하지는 못하였다. 그 모습을 본 하얀이 다시금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너무 좋은 분들이 많아서 기뻐요! 토모형 따라서 잘 배워볼게요! 너무 걱정마셔요, 바퉁.”
새삼 기특하다는 듯이 하얀을 바라보던 바퉁은 형이라는 소리에 그새 의기양양해진 토모를 보고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것 같아서 그만 돌아가야겠구나. 어름달에 조만간 한번 오려무나. 여기 초롱골도 멋지지만 어름달도 못지않게 멋진 곳이니 말이다.”
“네, 바퉁! 그렇게 말씀하시니 너무 기대되는걸요!”
바퉁과 하얀의 대화를 들은 토모가 쌜쭉이며 중얼거렸다.
“무슨 온통 얼음밖에 없는 곳이 뭐가 멋지다구.”
바퉁이 고개를 홱 돌려 쳐다보다 흠칫 놀란 토모는 다급하게 하얀에게 말을 건넸다.
“하얀, 우리 동쪽 구릉 아래에는 구불구불하고 멋진 언덕들이 한가득이야! 지금 가을에는 구름 아래가 온통 울긋불긋 얼마나 멋진데! 초롱골도 이쁘긴 하지만 가을의 동쪽 구릉은 최고라구! 초롱골에서 일이 정리되면 가장 먼저 동쪽으로 가보자!”
“토모, 가장 먼저 모모 할멈에게 인사하러 가기로 한 것을 그새 잊은 거냐? 너란 녀석은 정말, 허 참”
“아차차, 동쪽은 두 번째로 가야겠다. 헤헤.”
바퉁과 토모가 끊임없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하얀은 소리를 죽이고 배시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네, 좋아요. 토모형, 모모 할머니? 께서는 오늘 못 오셨나 봐요?”
“우응, 최근에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셨어. 이번 여름까지도 괜찮으셨는데 말이야. 그래서 모두가 걱정인걸.”
토모가 순간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바퉁은 그런 토모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금방 좋아지실 거다. 작년 겨울에도 이대로 가는가 싶었는데 괜찮아졌잖니.”
“그런 식으로 말하는 쿠릉은 바퉁밖에 없을 거예요! 그러면서 모모 할머니한테 제일 자주 가면서. 지나 누나 반만큼만 말을 이쁘게 좀 하세요!”
발끈하는 토모 머리 위에서 손을 뗀 바퉁은 풍성한 수염을 가다듬으며 괜히 딴청을 피웠다.
“이젠 정말 가야겠구나. 하얀, 곧 다시 보자꾸나.”
“네, 바퉁. 조심히 돌아가셔요! 곧 찾아뵐게요!”
바퉁은 자신의 덩치에 어울리는 커다란 구름 덩어리를 앞으로 멀리 밀어내고 기합을 내며 풀쩍 뛰어올랐다. 앞서 지나의 것과 비교하면 훨씬 커다란 구름 조각들이 다리를 놓기 시작하였고, 그 위를 바퉁이 부지런히 손과 발을 놀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멀어져가는 바퉁의 뒷모습 뒤로 하얀은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바퉁이 시야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 하얀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토모를 바라보았다. 토모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치켜들어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엣헴. 하얀, 이 토모 형만 믿고 따라와. 내가 아주 훌륭한 쿠릉이 되는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네! 토모 형! 정말 믿음직스러워요! 뭐부터 하면 될까요?”
기대에 차서 반짝거리는 하얀의 눈망울을 본 토모는 순간 엄습하는 부담감에 슬며시 팔짱을 풀며 중얼거렸다.
“근데, 뭐부터 해야 하더라...?”
흘러내리는 식은땀과 함께 토모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