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은 없듯이 말이야.
서쪽 바랑녘 아래에는 모래만 가득한 것이 아니었다. 모래사막 가운데 물방울을 떨어뜨려 놓은 듯 둥그런 물구덩이들이 군데군데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 가장 크고 깊은 물구덩이 위로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구름 덩어리가 두둥실 떠 있었다.
“모모 할멈! 모모 할멈! 꼬맹이들 데리고 왔어!”
피오가 우렁찬 소리로 모모를 찾기 시작했다.
“뭐야, 할멈. 어디 간 건가? 왜 반응이 없지? 혹시 하나로 떠난거 아냐?”
“피오 형! 말 조심해!”
심드렁한 피오의 혼잣말에 토모가 발끈하여 말했다. 하얀은 그 옆에서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저기, 토모 형. 하나로 떠난다는게 무슨 의미에요?
“아...쿠릉이 수명이 다해서 자연스럽게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걸 마른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그걸 어머니 하나에게로 떠났다고 말하곤 해.”
“에! 그럼 안 되는데! 모모 할머니! 어디 계셔요! 저 보고 가셔야죠!”
당황한 하얀이 구름 덩어리를 뛰어다니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덩달아 토모도 같이 뛰어다니며 모모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피오는 그 모습을 보더니 시끄럽다는 듯이 몸을 돌려 귀를 틀어막았다.
쏙-
그때, 구름 덩어리 속에서 웬 쿠릉의 머리가 하나 튀어 나왔다. 바로 모모였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잠깐 낮잠을 잔다는게 시간 가는 줄도 몰랐구나. 토모 오랜만이구나. 피오, 네가 아이들을 데려온게냐? 고생 많았겠구나.”
“어휴, 모모 할멈. 이 꼬맹이들 놓고 갈게. 고생이고 뭐고 도저히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모모의 갑작스런 등장에도 태연한 피오의 모습을 보고는 토모가 잠시 벙쩌있다가, 이내 피오의 장난이었음을 깨닫고 소리를 질렀다.
“아 피오 형, 뭐야! 모모 할머니가 낮잠 주무시고 계신지 알고 있었으면 말을 해 줬야지! 놀랬잖아!”
여전히 심드렁한 피오가 콧방귀를 뀌더니 자신이 몰고 온 구름을 정돈하더니 이내 조각조각 내어 뛰어오르기 좋게 밀어 던졌다.
“할멈, 지난주 동안 내가 주변 구름 다 정리한 거 알지? 그만 좀 드러눕고 제발 좀 움직이셔. 나는 여행 좀 다녀올테니까 그렇게 알고 내 구역도 부탁해.”
피오는 자기 할 말만 쏟아내고 뒤도 안 돌아보고는 남쪽으로 훌쩍 떠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보던 모모는 그저 허허 웃으며 피오가 떠나간 방향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후! 피오, 좋은 여행 되기를 바란다.”
“피오! 진짜 형만 아니었으면 내가 혼구녕을 내줬을 거에요! 모모 할머니, 혼 좀 내셔야 해요!”
피오 키의 절반에 겨우 닿을까 모를 토모가 분에 못 이겨서 방방 뛰었다. 하얀은 그 사이에서 토모와 피오가 떠나간 방향을 번갈아보며 곤란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모모는 토모를 끌어당겨 머리를 쓰다듬었고, 토모는 모모의 품 안에서 분이 채 가시지 않은지 씩씩거릴 뿐이었다.
“네가 하얀이구나, 반갑다. 나는 모모라고 한다. 이제 곧 하나로 떠날 늙은 쿠릉이지.”
모모의 말에 토모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모모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하얀도 가슴이 무거워지기 시작했지만, 이내 씩씩하게 대답했다.
“모모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하얀이에요. 만나게 되서 너무 기뻐요!”
“호호, 참 기운찬 쿠릉이구나. 멀리서 네 탄생을 느꼈단다. 참 따스한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멀리 오느라 둘 다 고생 많았구나.”
하얀은 모모의 다정함에 서쪽 바랑녘까지의 짧았지만 다사다난했던 여정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감격에 찬 표정으로 두 꼬마 쿠릉은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왠지 모르게 토모의 눈가가 촉촉해진 듯 하였다. 그 모습을 본 모모는 한 껏 더 토모를 끌어 안아주었고, 다른 한 손을 내밀어 하얀의 손을 잡았다.
“하얀, 네 아후 때 찾아가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최근에 구름 일을 하다 허리를 삐끗했지 뭐니. 도통 먼 길을 떠날 상황이 아니었단다. 가보지 못해서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구나.”
“모모 할머니, 괜찮아요! 대신 제가 이렇게 왔잖아요. 허리는 좀 어떠세요?”
“고맙구나. 이제는 다 나았단다. 피오 말대로 이제 구름 일도 하고 슬슬 움직여봐야지. 그간 피오가 내 대신 고생이 많았거든.”
피오의 이름이 나오자 토모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피오 형은 고생 좀 해도 돼요. 평소에도 게으름 피우면서 할머니한테 구름 일 넘긴다고 소문이 자자하다구요!”
“호호, 토모. 피오를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렴. 말은 저렇게 해도 속은 참 깊은 아이란다.”
토모의 머리를 쓰담이던 모모는 허리를 크게 피더니 두 꼬마 쿠릉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 산책이나 나가볼까? 바랑녘 소개도 할겸 말이지.”
“네! 좋아요!”
모모는 양손에 하얀과 토모의 손을 잡고 구름 위를 사뿐히 올랐다. 모모의 발걸음은 느릿느릿하였으나, 하얀과 토모의 짧은 다리를 생각했을 때 꽤 어울리는 셋이였다. 그렇게 셋은 온종일 바랑녘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바랑녘은 초롱골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초록 수풀과 평원이 드넓게 펼쳐졌던 초롱골과는 다르게 바랑녘에는 수많은 모래 언덕이 굽이치고 있었고, 건조한 바람이 쉴 새없이 불어오고 있었다. 덕분에 하늘 대부분은 맑고 청명했는데, 구름은 듬성듬성 있는 물구덩이 근처에 모여있거나 인근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떠밀려 오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이 때문에 구름 일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기보다는, 여러 군데 퍼져있었기에 모모는 이따금씩 구름이 보일 때마다 부지런히 손을 놀려야 했다. 하얀과 토모도 고사리 같은 손을 보태어 모모의 구름 일을 도와주었다. 얼추 근방의 일이 마무리되자 하얀이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와, 모모 할머니, 여기는 정말 일이 넓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초롱골은 일이 한 곳에 많은데, 여기는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하네요.”
“그러치? 구름이 없어보여도 마냥 쉬운 것이 아니란다. 내가 어머니 하나께로 떠나면, 피오가 꽤나 고생을 하게 생겼어.”
“자꾸 그런 소리 마셔요, 모모 할머니... 저랑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더 오래 보셔야죠.”
모모의 말에 하얀은 얼굴에 웃음기를 잃고 금새 시무룩해졌다. 일하는 내내 활기차던 토모도 말을 잃고 조용해졌다. 모모는 부드러운 미소로 두 꼬마 쿠릉을 번걸아 보더니 한 손씩을 모아잡고 말을 시작하였다.
“하얀, 그리고 토모. 이 모든 건 당연한 거란다. 어느 순간 이렇게 이쁜 너희가 탄생했듯이 오래 있던 것은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때가 오는 거지. 이걸 자연스런 흐름이라고도 부른단다. 마치 이 구름과 같이 말이야.”
토모는 여전히 모모의 말이 어려웠는지 미간을 찌뿌릴 뿐이었고, 하얀은 모모의 말에 다소 충격을 받은 듯 하였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다 함께 오래오래 즐거웠으면 좋겠는걸요.”
“그럼 제가 탄생해서 모모 할머니가 가셔야 하는 거에요? 그건 싫어요...제가 잘못했어요.”
모모는 두 꼬마 쿠릉을 토닥이며 나지막히 말을 이어나갔다.
“이 구름들은 항상 이리저리 떠다니고 움직이곤 하지. 그 모습들은 같은 모습 하나 없이 제각각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니? 우리가 하는 일을 생각해보면 없는 구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여오는 구름들을 그 시기에 맞게 있어야 할 모습으로 있도록 도와주는 것일 뿐이야. 그렇게 불어오고 떠나가는 구름들을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도 같지. 제 각각 다른 모양으로 모여 서로의 도움을 받아 있어야할 때와 장소에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지 않니? 그리고 다시금 새로운 곳으로 떠나가고 사라지는 거란다. 영원한 것은 없듯이 말이야.”
“내가 가야할 시간이 다가오는 것은 네 탓이 아니야, 하얀아. 약속된 순간이 다가오는 것일 뿐이란다. 네가 태어날 순간이 어느덧 찾아왔듯이 말이야. 우리는 그저 이 거대한 순환의 고리 안에 있을 뿐이지.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말거라.”
모모는 자신의 말이 여전히 두 꼬마 쿠릉에게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랑스런 아이들을 보니 가슴 한켠이 조금은 아리어왔다. 모모 자신도 안다. 떠나야 할 시기가 이제 곧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듯 말하였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도 외면하고 있던 두려움이 조금은 남아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쓴웃음을 잠시 지을 수밖에 없었던 모모였다.
“자자, 시간이 많이 늦었구나. 얼른 돌아가서 밤을 청하자꾸나. 종일 돌아다녔더니 너무 피곤한걸.”
모모의 너스레에 두 꼬마 쿠릉의 표정은 이내 밝아졌고, 언제 시무룩했었냐는 듯 금새 쉬지 않고 재잘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세 쿠릉은 처음 만났던 가장 큰 물구덩이 쪽으로 돌아가 하루 고단함을 풀며 잠을 청했다.
두 꼬마 쿠릉은 다음 날부터 모모를 따라다니며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멀리서부터 바람의 움직임을 느끼는 방법을 배웠고, 구름의 움직임에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큰 흐름을 읽는 방법도 배울 수 있었다. 단순히 구름을 일의 대상이 아닌 삶의 터전이자 함께하는 대상으로써 대하는 태도 속에서 두 꼬마 쿠릉은 한층 더 성숙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토모, 하얀. 이제 슬슬 다른 지역으로 떠나야 할 때가 되었구나.”
“벌써요? 아직 할머니께 배울게 한참 남았는걸요!?”
“아니, 너희는 이미 충분히 배웠단다. 나머지는 너희가 하기에 달렸지. 그리고 또 허리가 쑤셔와서 나는 좀 쉬어야겠는걸?”
모모가 익살스런 표정으로 허리를 두드리는데, 그저 모모의 아프다는 말에 다시 화들짝 놀라는 토모와 하얀이었다.
“토모 형, 우리가 너무 할머니를 힘들게 한 것 같아. 좀 쉬셔야겠어.”
토모 또한 하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는 못하였다.
“모모 할머니, 저희 금방 다시 놀러 올께요! 그 때까지 건강하게 계셔야 해요! 피오 형한테 일 좀 맡기시구요!”
“그래그래, 사랑스러운 쿠릉들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건강히 있어야겠구나. 다음은 남쪽 파랑만이 좀 더 가깝겠구나. 요요와 미누를 보거든 안부 전해주거라.”
모모는 하얀과 토모가 건너갈 구름을 한움큼 떼어 주었다. 두 꼬마 쿠릉은 미련이 가득 남은 발걸음을 힘겹게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꼬마 쿠릉은 남쪽으로 천천히 떠나기 시작하였다. 두 구름 조각들이 총총거리며 남쪽으로 이어지는 것을 바라본 모모는 남몰래 참아왔던 기침을 한참동안 뱉어놓기 시작하였다.
“아후. 토모와 하얀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 우리가 다시 볼 수 있기를...”
모모의 혼잣말만이 서쪽 바랑녘을 잔잔히 울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