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시절
9. 논에 물을 채우면 거울이 된다.
볍씨가 모가 된다.
햇빛 아래서 흙의 냄새를 맡고 물을 먹으면서 자란다.
모판을 만들면 열흘에서 보름 내에는 모내기를 해야 한다.
모판에 자란 모를 옮겨 심는 재배법을 이앙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심는 기계를 이앙기라고 한다.
논에다 볍씨를 직접 파종하는 것보다 벼가 많이 나는 기술이다.
모내기는 본래 사람이 많이 필요한 일이다.
이제는 사람들은 없고 기계 한 대가 다 심는다.
사람은 기계가 잘 돌아가도록 데모도※나 봐준다.
논마다 크기가 제각각이지만 모심기 전에 해야 할 준비는 다 똑같다.
논이 열 개면 열 번, 열두 개면 열두 번 모내기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벼를 심어야 하는 논은 개수로는 22개고 크기는 모두 합해 100마지기다.
이 지역 기준으로 1마지기는 200평 정도다.
지역마다 마지기의 기준은 다 다르다.
뜰이 넓은 전라도는 1마지기가 200평이 아니라 더 크다.
논은 벼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물을 넣고 빼기가 쉽고 가능하게 만드는 것.
논에 물을 넣으면 물이 새지 않고 유지되는 것.
이것이 논의 기본 시스템이다.
모내기를 위한 준비는 여기에 더해지는 업그레이드다.
쟁기질을 해야 한다.
쟁기로 흙을 뒤집어야 논에 새 힘이 생긴다.
가을에 하면 가을 쟁기. 봄에 하면 봄 쟁기다.
‘가을 쟁기는 진짜고 봄 쟁기는 시늉이다.’
봄 쟁기는 효과가 적다는 말이다.
올가을에는 볏짚을 넣고 가을 쟁기를 내가 직접 하는 게 목표다.
그래야 논에 흙이 튼튼해진다.
쟁기질이 끝나면 논에 물을 채운다.
논에 물을 채우는 것은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논에 연결된 농수로 물을 쥐어짜고, 관정이 있는 논은 전기를 연결하고 모터를 돌려서 물을 품는다.
애를 써야 눈에 물이 찬다.
논에 물이 차면 로터리를 친다.
'로터리를 친다'라는 것은 로터리 기계로 쟁기질한 흙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로터리는 두 번 친다.
초벌로 논에 자란 풀을 뒤엎는다.
초벌이 끝나면 물을 가득 채운다.
물이 가득한 논을 다시 로터리를 치고 써레질을 한다.
논을 판판한 도화지처럼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써레질은 수준 높은 기술이 필요하다.
물속에 있는 흙을 이리저리 옮기고 높낮이를 맞춘다.
시간과 정성과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
논에 물을 채우면 거울이 된다.
거울에 풍경들이 비친다.
한동안은 논이 거울이 되게 물을 채워둔다.
논이 거울이 된다는 것.
호수처럼 예쁘다는 것.
바쁘게 일할 때는 몰랐다.
모내기가 다 끝나고 호우 시절이 돼서야 알게 된다.
물이 마르면 논에 피가 자란다.
피가 자라면 벼는 덜 자란다.
예쁘게 하려고 물 채우는 게 아니고 농사를 위해 한다.
이앙기로 모를 심으려면 키가 적정한 기준까지 자라야 한다.
담뱃갑보다는 크게 자라야 한다.
물 잘 주고 햇빛만 잘 받으면 모는 본래 쑥쑥 자란다.
올해는 모가 덜 자란다.
자꾸 모내기하는 날이 뒤로 미뤄진다.
모내기 날을 잡았다.
모판. 비료. 제초제. 영양제.
이앙기에 들어갈 것들을 준비한다.
중요한 것은 논에 물을 빼는 것이다.
물이 가득한 논을 물 빠진 논으로 만드는 게 아깝다.
모를 잘 심으려면 물도 잘 빼야 한다.
크기에 따라 논에 물이 빠지는 속도가 다르다.
반나절 걸리는 논, 하루 걸리는 논.
논에 물이 많으면 논 주인이 손해다.
이앙기 주인은 논에 물이 많든 적든 심고 본다.
그러니 논 주인은 악착같이 물을 빼는 날을 맞춘다.
이앙기가 없어서 나는 서럽다.
내년에는 내 손으로 내 이앙기로 내 논에 모를 심는 것이다.
논에 물을 빼기 위해 발이 닳도록 뛰면서도 내년 계획도 세운다.
“벼농사는 돈이 안 돼. 하지 마.”
논을 빌려주는 논 주인도. 논에서 마주치는 다른 벼농사 농부도 말한다.
귀농센터도 벼농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다른 특화 장물을 추천한다.
이 지역은 특히 딸기가 일 순위다.
그래도 나는 벼농사를 한다.
“나 왜 이렇게 벼농사에 진심인 거야?”
모내기하는 내내 나는 카톡에 이 말을 썼다.
다른 사람들에 물었지만, 기실 궁금한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모내기로 바빠서 피아노는 뒤로 밀린다.
“당일 취소는 안 돼요.”
클라라가 정한 규칙이다.
미리 레슨을 변경하거나 미루면 친절한 클라라 씨는 보강하거나 환불을 해준다.
당일 급하게 취소하면 환불도 불가. 보강도 불가다.
“못 가유. 모내기가 많아유”
이렇게 카톡 하나 보내고 말았다.
돈도 아깝지만 무너진 내 일상, 일상의 유일한 위안이 꺼져버렸다.
‘피아노보다 벼농사구나’
쓸쓸하다.
레슨은 정체기다.
바흐 골든베르크 변주곡 변주 2번.
레슨은 끝났는데 다음 진도로 나가지 못한다.
처음부터, 아리아부터 변주곡 2번까지 정지 없는 완주를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든다.
남은 건 반복이다. 속도는 포기했다.
일정하기만 하면 속도는 괜찮다.
멈추지 않고 계속, 드라이브가 우선이다.
“다음 주는 앞에서부터 다시 쳐봐요”
가르치는 클라라도 나와 같은 걱정인가 보다.
이러다 변주곡 30개를 다 배우려면 100년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임윤찬이 카네기홀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했다.
그의 공연 영상을 본다.
악보를 손으로 긁으며 눈을 부릅뜨고 그의 연주를 듣는다.
변주곡 1번부터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내가 치는 게 시속이면 그는 무한한 우주를 달리는 광속이다.
더 듣고 싶어도 변주곡 2번까지다.
나머지는 내 진도에 맞춰서 듣기로 한다.
앞으로 임윤찬 연주가 롤 모델이다.
오후 1시.
집안이다. 피아노 옆 책상. 온도가 30도를 찍었다.
낮에는 일을 못 하는 시기가 왔다.
글을 써야 하는 시기지만 글이 솟아나지 않고 머뭇거린다.
비가 안 온다.
서울 쪽은 큰 비가 지나갔지만, 계룡산 아래는 비가 없다.
봄 가뭄이다.
저수지도 말라서 물이 적어진다.
모내기를 빨리 끝내서 논은 걱정이 없지만
지난겨울에 심은 어린 인삼들이 말라간다.
물을 주느라 바쁘다.
앞집 마늘 농부는 만평을 심었다. 비 한번 못 받고 마늘을 캤다.
큰 손해가 났을 것이다.
비가 안 와서 양파와 상추는 잘 자란다.
잘 자라서 물량이 넘친다.
양파 농부와 상추 농부도 손해가 크다.
농사가 잘돼도 손해 농사가 망해도 손해.
농부는 못 할 직업 같다.
땀이 흐른다. 에어컨을 틀어야겠다.
※ 데모도-조력공을 뜻하는 일본어. 나는 뒷모도라고 듣고, 뒤에서 모를 봐주는 사람으로 알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