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시절
10. 호우 시절-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다. No. 2
피아노 말고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
’사랑하는 그녀와 나란히 손잡고 걷는 일
걷다 잠시 멈추고 풍경을 바라보는 일
풍경을 보다가 그녀를 보다가 입 맞추는 일
사랑채 지붕 아래 덧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는 일
소파에 앉아 잠시 틈을 내 조는 일
졸음을 쫓은 후 둘이 맛있는 밥을 먹는 일‘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싶었지만, 혼자 등산을 가기로 한다.
농사짓느라 바빠서 근처 좋은 데를 가보지 못했다.
시골에 살면 늘 논이고 밭이고 다녀도 근처 산에는 가지 못한다.
서울 사람들은 멀리서 자가용 타고 버스 타고 오는 곳을 근처에 살면서도 못 간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다.
새벽일 나갈 시간에 산으로 간다.
내가 사는 곳은 계룡산이 품어준 지역이다.
계룡산에 아주 오랜만에 오른다.
30년 만이다.
세월의 숫자가 크다.
늙었다.
서울 친구에게 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낸다.
비 예보가 떴다.
장마란다.
비가 안 와서 걱정했는데 비가 온다더니 장마란다.
어쨌든 비가 온다.
좋은 비다.
논에도 인삼밭에도 좋은 것이다.
“장마라서 비가 많이 올까?”
걱정이다.
비가 오기 전에 물길을 내기 위해 삽질을 해야 한다.
달리기 말고 아침 유산소는 삽질로 대신한다.
모내기 끝나고 모가 땅 냄새 맡고 자리를 잡았다.
한적하다.
발소리를 듣는다.
수목원을 걷고 있다.
햇볕은 세지만 나무들이 반은 가려주고 그늘 새로 바람도 분다.
계곡 물이 눈을 맑게 한다.
걷기는 영혼을 키운다.
혼자서 걸으면 사색의 영혼이, 누군가와 걸으면 평온한 영혼이 자란다.
숲을 걷는 것과 논두렁을 타는 것은 다르다.
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로 키운다고 한다.
그래서 논두렁을 걷는 것은 일이다.
숲을 걷는 평온함이 없다.
비가 내리고 멀리서 친구가 찾아왔다.
수목원에서 나는 나무 냄새로 한껏 들뜬다.
두 친구도 원래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서울에 올라온 세월이 오래돼서 어릴 적 기억이 희미해졌을 뿐이다.
수목원이 집 근처에 있었지만 나는 몰랐다.
영화제 동료들이 나를 찾아왔다가 알려주고 갔다.
영화제 동료들과 한 번. 이번에 오랜 친구들과 한 번.
딱 두 번 왔다.
집 가까워도 못 온다.
시골살이의 자연은 일터일 뿐이다.
나는 서울이 좋다.
‘나 데리고 서울 가라’
속으로 말한다.
농담 반 진담 반이다.
바람 소리, 나무 흔들리는 소리, 수다 떠는소리에 내 마음 소리가 묻힌다.
비가 내리면서 여유가 생겼다.
호우 시절이다.
친구들이 다시 온다고 약속을 한다.
서울은 한동안 못 가는 걸로.
은빛 수목원은 무료다.
수목은 이름은 은빛이 아니라 온빛이다.
온빛 자연휴양림, 정식 명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