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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수 Nov 20. 2024

가장 위대한 예술(4)


◎ 유용수 :  스님, 요즈음 분노를 참지 못해서 발생하는 범죄가 많은 것 같습니다. 

길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위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보면 감정을 그대로 실어서 뱉어냅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몇몇 젊은이들은 자기감정을 억누르거나 절제하지 못한 맥시멀 리스트 maximalist 현상이 날로 심각합니다.

  서울대 유명순 보건대학원 교수 연구팀에서 2021년 “한국 사회의 울분 조사”를 발표한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발표한 내용을 보면 ‘만성적으로 울분을 느끼는 집단’이 58.2%(2020년 47.3%)로 2020년에 비해 11%가 늘어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또한 ‘중간 울분 상태집단’은 44.4%로(2020년 35.4%)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심한 울분을 느끼는 집단이 늘어나고 만성적인 울분을 느끼는 집단도 늘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앵그리 소사이어티”라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 확신, 소속감을 주지 못함으로써 사회 자체가 불안, 분노, 이기심을 낳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관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너그러운 용서를 말하면서 사회적으로는 출세 지향적인 성공 문화와 서열 중심 문화, 주택 소유 여부, 저소득층에 대한 국가 복지 확대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기성세대는 어쩌면 ‘가능성의 시대’를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노력하면 길이 보였고, 모두가 취업하는데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버텨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울분을 많이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스님 : 보통 분노는 불쾌감에서 적대감으로 그리고 격분하며 나타나는 행동이 아니겠어요? 울분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이유는 ‘불공정과 불평등’입니다. 사회는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공정이 무너져 자신이 그 피해의 당사자가 되거나 자신이 생각하는 신념이 무너뜨리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울분은 촉발한다고 봐야겠지요. 불평등이 심해지면 우울감이나 열등감으로 인해 사회 신뢰가 허물어지고 박탈감과 수치심으로 사회에 일어난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피해 당사자인 자신은 삶의 의미를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고의 폭이 좁아지고 사회나 상대방으로부터 입은 피해를 우선 계량화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행동과 언어가 부드럽지 않아요. 불평등과 불공정에서 오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생활 주변이 너그럽지 못하고 단순하고 공격적이지요. 모든 것이 개인적이고 경쟁입니다.     

내가 앞서지 못하면 뒤처져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낙오자가 됩니다. 그러니 낙오자는 분노를 느끼고, 증오하고, 좌절하고, 적개심이 쌓이는 것입니다. 흙수저와 금수저는 출발선이 다릅니다. 흙수저는 뒤따라갑니다. 뒤따라가면서 억울함도 있겠지요. 결국 마름은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설혹, 마름이 주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삶은 망가져 있습니다. 영혼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메말라 버리는 겁니다. 가슴에는 감정이 없습니다. 이성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 강박증과 탐욕이 먼저 지배합니다. 오직 출세를 위해 영혼을 불태우고, 순수했을 가슴을 오염시키면서 불나방처럼 출세를 위해 불빛을 찾아듭니다. 그러나 뒤늦게 자신을 깨달았을 때는 헤어 나오지 못한 늪 속에 처박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우울증이고 번-아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일어설 수도 없는 처참한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몰골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정신적 힘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불교에서는 자비이고 기독교에서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가슴에 감정이 없으니 사랑과 자비라는 단어가 들어갈 틈조차 없습니다. 

  나를 감싸지 못한 사람이 남을 사랑하겠습니까? 감정이 메마르고 폭력적인 사회가 조금이라도 변화되려면, 자신에게 허용하는 여유로움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홀로 있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 해답은 순수한 힘을 가진 자연과 친해져야 합니다. 자연과 친해지면 혼란스러움도 자지러집니다. 욕심도 한순간입니다. 혼란스러움이 금방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성숙해진 마음으로 혼란스러움을 마주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움이고, 자연이 우리에게 전하는 무정설법無情說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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