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용수 : ‘법정’ 스님께서는 행복의 척도는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느냐에 있다고 말합니다. 무소유의 자유로움이지요. “행복할 줄 모르면 늘 갈증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만족할 줄 모르고 욕심을 부린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한 ‘탈 벤 샤하르’ 교수는 “의식주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나면, 그 이상의 재산은 행복감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어떻게 행복을 얻을 것인가 보다 행복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나는 어떻게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다른 사람의 힘으로는 실현되지는 않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을 보면 자유스럽습니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자유스러워지려면 “비우면 된다.”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행복을 추구하기 전에 덕을 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덕의 뿌리에서 행복의 꽃이 핀다는 것이지요. 흔히들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일시적인 것과 찰나적인 것이 쾌락이라면, 행복은 영속적이어야 하고 깊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행복은 올바르고 참된 인격을 가진 사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의 행복은 그림 속의 궁전이라고 합니다. 요즈음 우리들의 삶은 지혜로움보다는 물질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행복은 항상 갈증 상태입니다.
◇ 스님 : 맞습니다. 만족할 줄 모르면 늘 갈증 상태에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켜 줄 어떤 것도 없습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 원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행복은 단순한 철학적 가치가 아니라 삶의 의미이며, 인간의 기본적 권리 중 하나입니다. 백 냥의 금덩이를 소유해도 천 냥, 만 냥의 금덩이를 소유하기
위해 발버둥입니다. 만 냥의 금덩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도둑은 맞지 않을까. 금값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사는 사람이 행복하겠습니까? 겉은 화려합니다. 고급세단 승용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고, 화려한 금은보석을 걸치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만, 그분은 매사가 불안합니다. 그것은 행복의 척도가 되지 못합니다.
몇 해 전, 법당에 노부부가 들었습니다. 처음 보는 분인데 법당에서 나오질 않는 겁니다. 무더운 여름이고 해서 모시고 나와 차 한잔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토목사업을 해서 재산을 모았나 봅니다. 특히 땅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5형제가 부모의 유산을 가지고 불화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노부부는 하는 수 없이 부부가 노후에 살아갈 정도만 남기고 자식들에게 다 나누어 주어 버렸나 봐요. 그랬더니 세상이 조용하더랍니다. 그리고 오늘같이 행복한 날이 없다면서 웃으시는 모습에서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았습니다. 가끔 다녀가곤 하는데 요즈음 뜸 하군요. “선과 덕을 쌓지 않고 행복은 내게 오지 않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히거나 질투에 눈이 먼 사람의 길은 항상 가파르고 험난합니다. 소유와 욕심의 굴레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자유로움, 그것이 행복이 아닐까요? 눈으로 보이는 행복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행복해지려면 혐오와 집착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행복은 고통으로부터 해방”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