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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지기 Feb 09. 2022

바람은 머뭇거리며 서서히 흐른다



산 그림자는 아침에 빠져나간 햇살을 더디게 따라가는지 아직도 눈밭에 걸려있다. 푸른 대숲을 거침없이 가로지르고 내려오는 계곡물을 거슬러 오른다. 몇 개의 대나무가 눈바람에 힘들었는지 비스듬히 누워있고 계곡을 채운 산물은 한량없이 맑다. 바람이 휩쓸고 간 연못에는 희뿌연 낮달이라도 떠오를 것 같고, 어젯밤에 머물렀던 초승달의 흔적은 채워진 물에 지워지고 다만, 대나무 이파리만 물속에 잠겨 있을 뿐이다.


산기슭에는 맑은 기운에 갇혀 동안거에 들지 못한 편백 숲이 시린 하늘 한쪽을 채워놓았다. 여름날 매섭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와 숲의 향기를 기억하며 삶의 뒷면에 숨어든 또 다른 속살을 호젓한 산길에서 조금씩 덜어낸다.


짊어진 삶들을 충족하게 채우지 못할지라도 부족함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할 것 같다. 힘들게 지나온 날들을 훌훌 털고 벅차게 다가올 내일을 기대해야 할 것 같다. 덜어낸 자리에 돋아난 충만함에 벅찬 기쁨을 맛보며 길을 걷고 있다. 산물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고, 바람은 머뭇거리며 서서히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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