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생각새싹

아낌없이 주지 않는 나무

by 어느좋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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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내리기도 하고,

매달아 놓은 그네도 타고,

피곤해지면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소년은 물건 살 돈이 필요해서 사과를 따서 가져갑니다

더 많은 세월이 지나고.. 소년은 나뭇가지를 베어서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떠나 버립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소년이 다시 돌아오자

나무는 안간힘을 다해 굽은 몸뚱이를 펴서 밑동을 내어 줍니다

늙어 버린 소년의 지친 몸을 기댈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사실 나무는 조금 후회가 됩니다

사과를 내어줄 때도

가지를 내어줄 때에도

소년에게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 말을 듣기 위해 내어준 건 아니었지만 못내 서운했습니다


소년과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사과를 내어주고 나서도

가지를 내어주고 난 후에도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만 감에 슬픔도 더해져 갔습니다


마침내 소년이 돌아오긴 했으나

이제 나무에게 남은 건 황량한 밑동뿐이었고

늙어버린 소년에게서도 이전 같은 활발함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나무는 지금 소년과 함께 있음에 분명 행복했지만

소년이 진짜 소년이었던..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내리기도 하고, 매달아 놓은 그네도 타던..

시절이 자꾸만 그리워졌습니다


나무는 그 그리움에 젖어 생각합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소년이 아무리 좋아도

다 내어주지는 않겠다고

설령 다 내어주고 싶어져도

한 번쯤은 참아보겠다고

하여..

소년이 오지 않는 낮과 홀로 지새게 되는 여러 날의 밤에도

소년과 노닐던 시간의 기억과 흔적들을 위로 삼아

혼자의 시간을 잘 견뎌내 보겠노라고

하여..

소년이 지쳐 돌아왔을 때, 시원한 그늘과 안락한 그네로

아무런 걱정 없이 노닐던 때의 추억을 선물해 주겠노라고

하여..

아낌없이 주지 않는 나무가 되겠노라고


그리움에 젖은 마음을 행복한 바람으로 말려가며

나무는 스르르 잠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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