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냥갑 Oct 05. 2021

나에게 친구의 존재란

한 때 친했다고 친구일까?

나에게 친구의 정의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지금의 나에게 친구는 ‘서로의 꿈을 알고 아무리 오랜만에 연락해도 서로 영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존재’다.


예전나에게 친구는 ‘예전부터 친했고   친한 관계를 이어오던 존재였다. 그래서 오랜만에 연락하기도 하고 예전의 좋았던 기억을 가지고 애틋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의 가치관은 계속해서 변화했고 성장형 사고방식이 되어갔다. “나이를 먹었으니 나는 이제 내리막길이네…” “나는 이제 경력이 단절되었으니 그저 아이들  키우는  중요하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듣다보면 나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낀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할 곳이 없어서였다. 나는 경력단절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한다. 네이밍이란 참 무섭다. 자신을 경력단절녀라고 말하고 아이엄마라고 네이밍하면 내 한계를 내가 긋게 된다. 아무도 그렇게 보지도 않는데도 말이다. 그런 의미로 워킹맘이란 말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워킹대드라고는 하지 않지 않나 ㅋㅋㅋㅋ본의아니게 유명한 미드 제목이 되어 버렸다 ㅋㅋㅋ


이 세상은 평등하지 않다. 평등했던 적 자체가 없다. 불공평한게 기본이다. 빌 게이츠도 Life is not fair, get used to it.이라 말했다. 빌 게이츠 얘기가 나와 조금 덧붙이자면 나는 빌 게이츠의 업적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상화시키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그의 삶을 살펴봤을 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욕망에 대해서도 깨닫게 된다.


나는 빌 게이츠와 같은 사업가를 존경한다. 그가 이룬 것들, 그의 평판, 영향력 등 모두 말이다. 하지만 인생은 길다. 나는 내 인생의 대부분을 성공적인 사업가로 보낸다음에, 인생 후반에 아이들이 다 크고 나서 남편과 갈라지는 그런 그림이 내가 원하는 행복일까 생각해봤다. 나에게는 아니었다. 결혼을 하든 안하든, 딩크족이든 아이가 있든, 이혼을 하든 졸혼을 하든 등으로 삶의 우열을 말하고자 하는게 전혀 아니다.


나는 아이를 갖고 싶었고 그 선택에 결혼은 필수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그리고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그 갈등을 잘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나의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었다. 적어도 나의 삶에서는 말이다. 그렇기에 빌 게이츠의 삶을 보면서 <다크호스>에서 나오는 ‘비판게임’​을 해보자면, 나는 이혼한 빌 게이츠는 그다지 부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둘다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모든 전략을 접근하게 된다.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왜 빌 게이츠 얘기가 나왔느냐 할 수 있겠지만 부부란, 진사회성 동물인 우리가 가장 가까이서 구성하는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가깝고 진실된 내 편이 될 수 있는 게 배우자이면서, 내 삶을 망칠수도 있는 최악의 인연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배우자는 가장 가까운 관계이면서 내 꿈을 응원해주는 친구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의 정의 또한 여기서 이어진다.


배우자와는 서로의 꿈을 응원해주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서로 하기 싫은 일을 떠넘기는 관계가 아니라.



친구도 마찬가지다. 나는 자신의 꿈을 찾고 그 꿈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이면서 나와 인연이 닿은 사람 모두 나에게 친구다. 단순히 1년 알았다고 친구인게 아니라는 얘기다. 어떤 사람은 친구인 줄 알았지만 타인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여지는지에만 신경을 쓰며 자신의 실력 쌓기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란 걸 뒤늦게 깨달은 적도 있다. 그건 그것대로 스쳐가는 인연이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해가 되는 영향을 주고 타인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그것은 결국 나에게 나쁜 사람인 것이다. 나는 신뢰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신뢰란 자신에 대한 신뢰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신뢰가 제일 중요한지도 모른다. 강자와의 신뢰만 지킬려고 하면서 약자와의 약속은 소홀히 하는 사람은 신뢰해서는 안된다. 게다가 자신과의 신뢰를 깨버리는 사람이 계속해서 성장하는 사람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자존감이 낮아보이지 않아도 자신과의 신뢰를 잘 깨먹는 사람은 부정적인 악순환에 잡아먹히게 된다. 그런 이들은 진짜 중요한 것보다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에만 목매는 괴물이 되기도 한다. 그런 사람이 인플루언서가 되거나 사업가로 성공한다고 하면 그게 더 무서운 일이다. 가까이 하지 않는게 내 신상에 여러모로 좋다.


나는 애덤 그랜트의 책 <기브 앤 테이크> 속 성공하는 기버​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기를 쓰고 실력을 올리려고 좋은 습관들을 쌓아나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매쳐다. 받는만큼 돌려주려고 하는 게 매쳐다. 세상 사람 중에 소수는 테이커다. 하지만 다들 자신이 테이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테이커라고 해서 반드시 악한 마음을 먹은 테이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감사할 것에 감사하지 않고 그저 눈팅만 하는 사람, 친구의 좋은 일을 마음 속 깊이 기뻐해주지 못하는 사람, 누군가가 주는 것을 찾아다니기만 하고 내가 배운 것을 정리하고 나누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결국은 테이커다.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테이커가 숨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다들 기버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왕 그렇다면 성공하는 기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기버에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호구인 기버와 성공하는 기버다. 호구인 기버는 어쩌면 테이커보다도 더 나쁘다고도 볼 수 있다. 자신이 남을 도와주고 있다는 걸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자신의 성취가 낮은 것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우리 모두 <냉정한 이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기브 앤 테이크> 속 진짜 메시지는 ‘실력이 있어야 진짜 줄 수 있다’이다. 실력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서 힘든 사람을 도와준다…그것만큼 더 큰 폭력은 없지 않을까? 그 힘든 사람은 무슨 죄인가.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정보란 녀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닿는 세상이다. 그러니 남을 도와주기 전에 실력부터 쌓는게 먼저라는 얘기다.


과거에 사회적 기업에 관심이 많았던 내가 이제는 그 분야를 거들떠도 안보는게 그 이유다. 착한 일을 하는 게 수익을 내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


나는 그 누가 잘 나가든 마음 속으로부터 응원해준다. 만약 질투가 난다면 재빨리 실행을 해서 내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만들면 되니 더 땡큐다. 그 사람이 잘 나가서 나에게 무언가가 더 떨어질까해서 더 응원하고, 별로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그 사람의 긍정적인 변화에 관심이 덜하고 그런 건 전혀 없다. 나는 ‘그 사람의 기울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축하를 덜(?) 한다는 것은 그 일에 별 관심이 없어서인 경우다.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등학교 친구의 승진을 축하한다고 말하고나서 그 친구가 만족할 때까지 치켜세워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구가 서운해했던 일말이다. 나는 삼성전자라는 회사에서의 승진이 그 친구에게는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한 허울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는 과연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하고 말이다. 이 친구는 회사에서의 일을 물어봐도 항상 불만 투성이었다. 그리고 가족과의 일도 그랬다. 자신의 불만을 터놓는 것 자체를 신나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이 부러워하는 삶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쉽게 티가 난다.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모든 선택을 내린다. 누군가가 부러워해주길 바라며 모든 행동을 한다. 사랑하지도 않는데 해외여행가서 프로포즈를 받았다며 결혼을 결심하기도 한다.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데 과거 썸을 탔던 이들의 얘기를 하며 그 때를 그리워한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는데 남들이 다 낳으니까 낳았고 육아가 힘들어 죽겠다며 신세 한탄을 한다. 나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과 1분1초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 그 당시엔 친구 상황이 힘들어서 외로워서 그럴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들어주고 이해해주다보면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와 가치관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어쩌면 그 친구는 그대로였고 내가 변한 건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그런 관계를 친구라고 말하기는 이제 지친다는 얘기다.


육아도 인생도 먹고 사는 일도, 그 무엇도 쉬운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바꾸는 사람과 주위탓만 하는 사람은 아우라 자체가 다르다.


나는 이제 남탓, 환경탓을 하는 사람은 믿지 않기로 했다. 그게 나의 정신건강 상에도 이롭기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