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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문제, 국가가 개인의 '신체'관리를...

그것은 이렇습니다.[6~6]

by 임진수

그것은 이렇습니다. [6-6]


문제 해결은 무엇인가? 6-6 그물음을 던지다.

성적 피해자의 자기인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섹슈얼리티의 자기 결정자로서 여성 성·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의 섹슈얼리티, 여기서 단적으로 신체, 에 대한 결정권이 자기 자신에게 속하며, 아버지나 남편 등 가주 장권에 속하지 않는다는 주체의식을 수반한다.


‘위안부’ 소송 대해 일본 정부는 전후 보상은 1965년 한일조약으로 해결했다고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가부장제의 논리를 날카롭게 찌른 것은 개인보상 청구권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위안부’ 소송을 지원해온 단체인 야마사키 히로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지금 어떤 여성이 강간을 당했는데 그 범인이 남편이나 부친과 합의가 끝났기 때문에 이미 해결되었다”고 말하면 납득할 수 있겠는가? 아니라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여기서 ‘남편이나 부친’을 ‘국가’로 바꿔보면 알기 쉽다. 한국 정부는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며, 일본 정부를 지원함으로써, 개인을 국가의 귀속 물로 환원했다.


개인 청구권 논리는 국가가 개인 (의 이해)을 대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국민국가를 초월하는 성질을 갖는다.


따라서 피해 여성과 그 지원 단체가 싸워야 할 한일 양국의 가부장제도이기도 하다. 전시 강간 패러다임은 가부장제 변종이 “전시 강간” 전시 패러다임이다.


강간의 비전투원에 대한 가해 행위이기 때문에 당연히 국제법상으로도 위법일 뿐만 아니라 군사 법규에도 위반된다.


국제 극동 군사 재판소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는 ‘위안부’는 성 노예에 해당하지 않으며, 유엔 인권위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책임을 추궁하는 기관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당시 공산권이 붕괴한 후 ‘보스니아’에서의 ‘강간 캠프’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것이 단순히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군에 의한 조직 씨 ‘민족 정화’의 인종 말살정책이라서 사 실 이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국가가 버리다”일본군 ‘위안부’ 전쟁 피해자 300여 명이 “한국 정부의 무관심과 무책임”에 항의하고자, 모든 국적 권리 포기각서를 제출했다. 이는 ‘위안부’ 소송의 개인배상 청구는 나의 권리를 국가가 대표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국적을 갖지 않는 다면 한국과 일본 간의 약속은 의미가 없다고 봤고, 따라서 “한일조약으로 해결되었다”는 핑계는 통용되지 않게 된 셈이다. 일본군 ‘위안부’는 국가만의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남자에 의한 성범죄 이기도 하다.


독일의 경우 과거를 청산하고 화해의 길을 걸어가며, 어떻게 상처받은 커뮤니티를 재건해 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20세기의 독일은 두 개의 독재 사회를 경험했다.


'하나는 나치이고 다른 하나는 동독이다. 특이할 만한 것은 동독은 비밀경찰과 밀고자로 구성된 전체주의 국가로, 국민 70~80% 명중 한 명이 비밀경찰인 셈이다. 여기서 개인의 비밀 파일이 무려 180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당시 교도소에서는 7년간의 구금되어 있던 사람이 그 훗날 심리학을 연구하게 되었고, 이런 사회가 불과 1990년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현재 이 본부는 ‘007’에 버금가는 첩보 도구를 전시하는 기념관이 되어있다.


성·윤리를 저버리면 ‘국가나 개인 모두 파멸의 비애를 가져다’ 준다.

화려한 영광을 가진 사람들 또한 고의든 타의든 어느 한순간 성에 집착하여 인생을 파멸한 사례들은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부패한 권력의 상징은 여성을 학대하거나 편향적으로 성의 매너리즘에 빠져 성이라는 사건으로 손에 쥔 권력을 내려놓게 된다.


때로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목숨을 내놓아 결국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이렇듯 비인간적인 사람들은 여성의 성을 이용한 정치가들은 일반적인 사회에서 심지어는 국가가 여성들을 해외로 내보내 성을 이용한 매춘이 이뤄졌다.


결국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여성들의 성은 남성들에 의해 놀이게 감이 되어,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성에 대한 인권을 무시당한 채 우리 주변에 상존한 성폭행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사회 곳곳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연예인의 육체를 탐하는 권력자와 손잡고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도덕적인 관념을 벗어나 자신만의 욕구를 충족하려는데 서 기인한다.


그리고 성을 이용하여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인간적인 성폭력과 학대를 해도 쉬쉬하며 넘어가는 풍조 또한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피해여성 그 자체로만 치부해 버리는 정치적인 모순과 사회현상의 확대 재생되는 고질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위안부’ 강제 동원했다고 뒷받침할만한 실증 자료가 없다는 점이다.


역사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바깥에 설 수 없다. 역사학은 자기 언급적인 성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역사를 거역할 수 없는 그 시대의 구성원의 일부가 된다. 바꿔 말하면 여성에게 역사는 없었다.

"우리 정부가 양국 간의 첨예한 문제가 있다며 , 협상에 소극적이자, '위안부'여성들은 차라리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밝히고, 국제재판소에 호소한 바 있다"

끝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나눔의 집’에서 공동으로 살고 있으며, 마지막 여생이 남아 있는 듯, 차라리 그 시대로 가기 위해 조용히 잠들어 있는 모습은 나 자신의 거울이라고 생각해보자. 거울은 내가 웃어야 비로소 웃어준다.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재판관이다.


[참고문헌:‘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다시 쓰는 <내셔널 저널리즘과 젠더> <우에노 지즈코, 이성희 현실 문학, 휴머니스트 등> 사진 정대협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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