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일, 2년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마흔둘, 좋은 회사지만 계약직으로 입사를 결정하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리고 입사의 기쁨과 동시에 2년 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걱정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날 아침 나는 이렇게 두 가지 감정을 지닌 채 사무실 의자에 앉았다.
그때로부터 어느덧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지금 구성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강의를 하며 연구하면서 지내고 있다. 7년 전에 입사한 그 회사에서. 계약직도 아니다. 계약이 만료될 즈음,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주변에서의 인정과 지원 그리고 도움이 컸다.
십여 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전역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서른여섯 나이에 박사과정이었다. 학령기에 접어든 두 아이의 아빠이자 남편으로서 안정적인 수입이 없이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아내가 보내 준 믿음과 응원이 없었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기도 했다.
결정을 내리기 전, 군(軍)에 있을 때 교육을 받았던 교수님들과 상담을 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계신 분들이었다. 예상치 못했지만 세 분의 교수님 모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공부를 시작하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공부가 곧 자신에 대한 확실한 투자이고 미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가족과 교수님들의 응원에 힘입어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해결해야 하는 또 다른 문제 앞에 직면했다. 가치나 의미, 목적과 방향 등과 같은 이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학비와 생활비 등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였다.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해결이 쉽지 않았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던가? 학비가 먼저 해결되었다. 장학금을 받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공부를 하면서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이에 더해 학부생을 대상으로 강의도 하게 되었다. 지도교수님의 배려와 신뢰가 컸다. 덕분에 3년 반 동안의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졸업을 했다. 2013년 2월이었다.
학위논문을 마무리하고 감사의 글을 적는데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은 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족은 물론이고 군에 있을 때의 지휘관, 선배, 후배 그리고 학우와 친구들. 비록 몇 장의 지면에 남긴 짧은 감사의 글이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분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씩 그 글을 읽어보며 초심을 다잡아본다.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였지만 덕분에 많은 분들을 알게 되었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다양한 회사와 기관에 계신 분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만남은 또 다른 만남으로 연결되었고 한 분 한 분으로부터 업무적으로나 관계적으로나 배운 점들이 많았다.
한 번의 만남을 소중히 생각했다. 명함을 주고받으면 먼저 연락을 드렸고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간간이 안부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이어진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이제는 경우에 따라 도움을 드리기도 한다. 요즘에는 만나면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며 함박 웃음을 짓는다.
이에 더해 직무와 관련된 소중한 경험들도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다양한 조직문화와 새로운 콘텐츠들을 접할 수 있었다. 만일 한 조직에 머물러 있었다면 경험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대부분 처음 해보는 일들이었지만 팀으로 움직였기에 가능했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채워나가려고 노력했고 기여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실력과 경험을 쌓아나갔고 이 모든 것은 온전히 나의 자산이 되었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러나 공부를 시작할 때 다른 사람들보다 한참 늦게 출발했다는 생각에 조바심도 생겼고 불안하기도 했다. 지금 되돌아보니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생각이다. 공부를 먼저 하고 사회로 나가 경험을 쌓는 길도 있지만 사회에 나가 경험을 먼저 쌓고 공부를 하는 길도 있었던 것이다. 두 가지 길이 있었는데 나는 두 번째 길을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은 서로 맞닿아 있었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 감사했다. 적어도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후배들이 있다면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해 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군(軍)에서의 전역을 결심하고 사회로 나갈 때 두 가지를 생각했다. 먼저 관심있는 분야를 선택하겠다는 것이었다. 관심이 있어야 몰입할 수 있고 몰입할 수 있어야 성과도 기대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관심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지속성도 보장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나의 관심은 HRD(Human Resource Development), 즉 인적자원개발 분야였다. 이러한 관심은 학부와 석사 전공에서 비롯되었다.
다음으로는 강점을 찾아보겠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군(軍) 경험에서 찾았다. 정훈병과 장교로 근무하면서 상대적으로 강단에 설 기회도 많았고 글을 써야 하는 일도 많았다. 타고난 재능은 아닐지언정 수년 동안 켜켜이 쌓인 경험에서 결국 나의 강점을 찾을 수 있었다.
강점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일상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숨겨져 있었다. 그동안 찾으려 하지 않아서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찾고자 하는 생각을 하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들이 틀림이 없는 듯하다.
관심 분야와 강점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두근거림을 느끼게 되었다. 두근거림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자신감이 없는 순간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설레임의 순간에도 나타난다. 나는 이 두근거림을 기회가 왔다는 신호로 재정의해봤다. 그리고 또 다른 도전의 원동력이 생겼다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피하지 말고 즐기고자 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전역 후 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성장했다. 외적인 측면에서의 성장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유용한 무언가를 기여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측면에서의 성장이다.
수년 전부터 나는 관심을 가졌던 분야에서 강의를 하고 글을 쓰고 연구를 하고 있다. 직업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나를 필요로 하거나 찾는 곳이 있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다가간다. 스스로 만족하고 있으며 다행스럽게 함께 있는 이들로부터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나는 나의 삶과 일을 사랑하고 있으며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劍短知則 一步前進. 與件不備 努力倍加’ 검이 짧다고 생각되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이 부족하다면 노력을 더하라는 의미다. 이런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닉 채터(Nick Chater)는 그의 책 ‘생각한다는 착각(원제: The Mind is Flat)’에서 결과를 알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한 번 시도해보는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나 역시 시도해봤고 결과를 알게 되었다.
어떤 일이든지 처음이 어렵다. 낯설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며 익숙치 않다. 미루고 싶을 때도 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내가 했던 선택은 시도하는 것이었다. 못하겠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이유들이 수도 없이 떠오른다. 반면 하겠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방법들이 곳곳에서 생겨난다. 더군다나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즉 귀인(貴人)들도 나타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은 선언적인 말이 아니라 사실이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젊은 청년 장교의 모습은 사진 속에서 그리고 과거의 추억을 소환할 때만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시절의 DNA는 남아 있다. 도전하고 시도해보고 안되면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