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 도시 여자들’이란 드라마에서 술꾼 여주들은 미쏘를 즐겨 마신다. 미지근하게 마셔야 알콜 맛이 더 잘 느껴진단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미쏘에도전해봤는데 알콜약을 먹는 느낌이었다. 술꾼 아닌 나에게, 소주는 역시 차야 옳다-
어디 술 뿐인가. 난 커피도 차거나 뜨겁게만 마셨다. 적당히 미지근한 커피는 질색.
여름엔 차가운 얼음 동동 띄워 시원하게 들이키는 커피가 좋았다. 차가운 카페인은 한여름에 늘어져 있는 나의 눈을 번쩍 띄어주는 향기로운 각성제였으니.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 미리 얼려둔 얼음을 깨 넣어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큰 기쁨이었다.
추운 날엔 달콤한 디저트와 함께 따뜻한 커피를 즐겼다. 차게 얼어있는 손을 따듯한 커피잔에 데고 호호 불어 한 모금씩 마실 때, 그 커피맛이란! 사실 진짜 커피의 맛은 여름에 빨대 꽂아 물처럼 쭉쭉 빨아먹을 때보다 조금씩 음미할 때 더 잘 느껴진다.
하지만 육아를 시작하며 아아와 뜨아를 즐기는 나의 힐링 모먼트는 박살이 났다.
아아를 즐기지 못하는 건 얼음 정수기 없는 우리 집에서 얼음 뽑는 과정이 아주 번잡스럽기 때문. 매일 저녁 얼음을 얼려놔야 하고, 얼음을 깨서 잔에 넣어야 하고, 얼음 케이스를 씻어놓아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한데 육아할 때의 나는 이 모든 과정을 해야 할 단 5분의 시간이 아.깝.다. 그 시간에 드러누워 체력 비축을 하지, 얼음 세팅을 왜하겠는가.설령 힘겹게 아아를 만들었더라도 아기가 갑자기 울면...? 아기를 달래놓고 마시려 할 땐, 이미 얼음이 반은 녹아있다. 물 반, 커피 반 맹맹한 커피를 마실 바에는 냉수 한 잔 들이키는 게 차라리 낫다.
뜨아를 즐기지 못하는 것도 타이밍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 따뜻한 커피는 천천히 한 모금씩 즐겨야 하니 적당한 시간 확보가 중요한데 매번 아기의 컨디션에 좌지우지되는 수동적 스케줄러의 삶에선 이 여유를 즐기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커피를 포기하기엔 카페인에 중독된 뇌가 날 놔주지 않았기에, 나는 커피의 온도를 포기하기로 했다.
요즘은 1L 콜드부르 커피를 대용량으로 사놓고 마신다. 냉장고에 커피를 뒀다가 꺼내서 애매하게 차가운 커피를 그냥 물처럼 들이키는 것. 얼얼하게 시원한 맛은 없지만 냉수보다는 향긋한 커피. 직접 내린 핸드드립 커피처럼 뛰어난 맛은 아니지만 입가심 하기엔 아쉬움이 없는 수준.
냉장고에 채워두는 대용량 커피
싱글 시절의 나라면 얼음이 없어서, 미지근해서, 맛이 애매해서 쳐다도 안 봤을 커피지만 요즘은 커피가 떨어지면 바로바로 채워 넣으며 소중히 마신다. 맛 보다는 아기를 안고 커피를 마신다는 그 짧은 시간이, 그 자체로 아주 달다.
누군가의 시선엔 커피 한 잔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내가 짠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취향이 확장된 것이라고 날 토닥인다.
예민했던 내가 아기 덕에 조금 더 둥글둥글해지고, 덜 까다로워지고, 여유로워진 것이라고 말이다.
이 기세라면 미지근한 소주도 왠지 맛있게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알콜맛이 강하면 더 빨리 취할지니, 어떻게 보면 시간 없는 애미에게 딱 필요한 술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