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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영 Aug 14. 2016

진창의 삶이라도

한강_채식주의자

생각보다 책은 술술 읽혔다. 우리 집으로 여행 온 친구들이 긴 비행으로 쌓인 피로를 풀며 아침잠을 자는 동안 이미 절반 가까이 진도가 나갔다. 만약 이후 일정이 없었더라면 앉은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어버렸을 것이다. 어려운 문장도, 어려운 단어도 없었다. 이해를 위한 역사적 사실이나 정보조차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굉장히 가뿐했다. 그러나 읽는 내내 좀처럼 편할 수가 없었는데, 아마도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 속도를 마음이 따라가기엔 너무 버거워서였던 것 같다. 같은 이유로, 책 읽는 내내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 같더라, 고 평한 이들의 마음도 헤아려졌다.





누구의 눈을 통해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지, 사실은 그것부터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통상적으로 소설을 읽을 때면 꼭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감정을 이입할 대상이 한 명쯤은 존재하기 마련인데, 시선에 따라 쪼개어진 세 명의 화자(영혜의 남편, 형부, 언니)에게도, 이야기 중심에 있는 영혜에게도, 그 외 주변 인물 중 어느 누구에게도 좀처럼 감정을 내맡길 수 없었다. 결국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채 줄거리를 읽어 내려가며 끊임없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 질문했지만, 더 많은 질문들이 이어질 뿐 쉬이 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라도 이해하고 싶었다.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는 영혜를, 그리고 그녀의 남편을 양 극단에 놓고 그 사이 어딘가를 헤매었다. 현실에 단단히 묶여있는 나는 실제로는 영혜의 남편을 조금 더 닮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불현듯 채식주의자 선언을 해버린 영혜를 이해 못할 이유도 없었다. 아주 가끔이더라도 태곳적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것은 세상에 대해, 그리고 사람에 대해 알아가면 갈수록 그저 몰랐던 때가 나았더라는 감정의 복합성을 경험할 때면 불현듯 등장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면서도 영혜와 완전히 포개어지기엔 현실의 남편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내 본래의 무엇이 가족의 울타리를 넘는 어떤 것임을 알았을 때, 그저 자꾸 튀어나오는 나를 깎아내며 가족의 틀 속에 남으려 애쓰는 작은 자아가 발버둥 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고반점>을 읽을 때는 사회적으로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욕망이 예술로 승화되면 그것은 더 이상 평가의 범주에 남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물론 소설 속에서 영혜의 형부에게는 그가 관계 맺었던 모든 것에서 철저히 소외당하는 중형이 선고된다. 심지어 그에게 하나 있던 딸도 만날 수 없게 되었고, 끝까지 지키고 싶었을 예술작품인 비디오도 그의 소유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아득해온 까닭은 영혜의 형부를 향한 모두의 손가락질과 경멸이 결국 인간이 만든 테두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자각 때문이다.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깨닫는 순간, 그것을 어느 누가 단죄한단 말인가. 


영혜가 상징하는 바가 '태곳적 순수한 무엇'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해 아름답다 말하지 못할 이유가 '법으로 맺어진 가족'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 또 하나의 폭력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미 법적 테두리에 살기로 결심하고 결혼하여 자녀까지 둔 그의 선택을 잘했다 칭찬하고 싶은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한마디 불평 없이 안팎의 살림을 혼자 해내는 아내에 대한 연민이 꾸역꾸역 올라오는 것을 구태여 막을 생각도 없다. 다만 각자가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이 마치 자발적인 선택인 듯 보이지만, 결국엔 우리의 생김대로 피치 못하게 흘러가버리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표했던 재발에 대한 우려는 단지 표면적인 이유이며,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 애가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 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나무 불꽃>에서 인혜를 움직이는 밑천이 '책임감'이라는 것은 아주 명확해진다. 진창 같다는 삶을 두고 의식의 저편으로 넘어가버린 동생에 대한 미움, 그것은 빌어먹을 책임감을 결코 떨쳐낼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극명히 대비되는 무엇이었다. 그녀의 책임감은 부부관계에서 더욱 강화되는데, 실제로 나는 158쪽부터 시작되어 5페이지에 달하는 부분이 이 책의 모든 인간관계를 설명하고 있다고 느꼈다. 손이 거친 아버지로부터 동생을 보호해야 했던 언니, 열아홉부터 시작된 서울생활에서 혼자 버티고 견디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여자, 그리고 동생과 어딘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는 고독한 예술가 남편과의 결혼생활. 


(....) 마치, 그녀가 영혜를 낯설게 느끼는 것만큼이나 영혜 역시 그녀를 낯설게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침착하다는 인상을 넘어 거의 적막하게 느껴지는 그 얼굴 앞에서 그녀는 대답을 잃었다. 그것은 남편의 우울한 태도와는 전혀 닮은 데가 없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동일하게 그녀를 좌절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다 비슷하게 말수가 적어서였을까.


그녀를 좌절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그녀가 아등바등 기를 쓰며 애써 지키려 했던 것, 본래부터 인생은 그렇게 무거운 것이라 느끼게 했던 것, 그래서 자신은 돌아다볼 겨를도 없이 짓눌려온 것, 그러니까 그녀 스스로가 만들어낸 책임감... 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비슷한 크기와 무게로 주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던 것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 충격과 분노. 그러면서 동시에 인혜를 지탱해나가는 힘 또한 책임감이었기에 그녀는 끝까지 그것을 버릴 수 없었으리라. 


인혜의 자기 증명 방법이 책임감을 통한 것이라고 해서 인혜 남편에게도, 영혜 남편에게도, 심지어 한 집에서 나고 자란 영혜에게도 같은 방법을 강요할 수는 없다. 각자의 결핍은 긴 시간을 건너며, 분명 어딘가는 더 깊게 패고, 어떤 부분은 더 단단해졌을 테니. 그래서 같은 결핍을 경험했더라도 이제는 분명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을 것이므로. 


우리의 인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에 대한 무수히 많은 평론들이 '인간이 가진 폭력성'에 대해 말하지만, 결국 그 폭력성이란 것도 각자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선택들이 서로 맞물리고 부딪쳐 팽창하고 터지는, 일종의 마찰음 같은 것은 아닐까. 오월의 신부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강직한 성직자의 이미지를 가진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였던 그에게, 침을 뱉고 손가락질을 할 만큼 나는 나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하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하루살이처럼 살아가기 바쁜 까닭에, 그리고 나의 결핍을 채우려 이미 구축되어온 관계와 세계를 무너뜨릴, 그러니까 결국 나의 밑바닥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까닭에.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창의 삶이라도, 그것은 감히 아름답다는 것이다.   


2016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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