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_당신
사랑은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자기희생임을 가슴 절절히 보여주며 끝나버린,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중 사랑이 제일이라 하는구나 싶었던, 결국 손바닥 뒤집듯 삶도 죽음도, 사랑도 결핍도 하나로 이어져 고난에 맞서 인내하고, 상처에 맞서 관용한 자만이 좁은문으로 들어가는구나 싶었다.
2016년 5월 18일
처음 영화 <은교>를 통해 '박범신'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이미 그의 나이가 칠십 줄에 가까운 예순여섯 일 때였다. 주인공 '이적요'에게 현실의 그 자신을 얼마만큼이나 투영시켰을지는 모르겠으나, 죽음의 문턱과 마주한 한 노인의 시선이 은교의 구석구석에 가닿을 때마다 나는 몹시도 불편했다. 아마도 앞으로 살아갈 날이 지금껏 살아온 날보다 적어지는 그 어느 때에 다다르면 세상에 대한 어떠한 욕망이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문득 작가의 진짜 의도가 궁금해졌다. 한 달 반 만에 완성했다는, 소설 뒤편 어딘가에 '내가 미쳤다'라고 적어놓은, '밤에만' 쓴 소설이니, '밤에만' 읽기를 부탁한 그의 내밀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은 아니다.
책 속에서는 영화에서 들여다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였다. 그것은 죽음 앞에 다가선 한 노인이 마음으로밖에 품을 수 없는 한 소녀에 대한 애절한 사랑과, 그리고 그 너머 젊음에 대한, 생생히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갈망이었다. 일부 독자들이 이에 대해 '노욕'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았으나,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만 놓고 보자면 그 대상이 열일곱 살 은교이든, 되돌아 가고 싶은 그의 젊은 날이든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정할 수 있을까. 집착하는 마음이 사랑이 뒤틀린 못난 감정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우리 모두가 되도록이면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 없음에서도 피어날 수 있다고 어느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은교>로부터 4년이나 지나 읽은 박범신의 또 다른 장편 소설 <당신>. 나는 이토록 지독스럽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 몸서리가 쳐졌다. <은교>에서 보여준 사랑이 사회가 터부시 한 것을 소유하고픈 갈망으로 치달았다면, <당신>에서의 사랑은 잔잔할 줄로만 알았던 '그저 인내하며 버티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숨통을 조여올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짧은 인생에서 단 한 가지 맹세만이라도 지킬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다행이겠냐고, 그래서 자신은 사랑하는 여자 희옥만을 위해 오롯이 살겠노라 맹세하고, 그것 하나로 버텨온 주호백의 인생. 책 속 어느 구절처럼 그의 사랑은 그저 스스로를 위한 무엇이 아니라, 법열에 다다르기 위한 고난과 상처의 나열이었다.
단지 나를 행복하게 하려고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고난에 맞서 내가 얼마나 인내할 수 있는지, 상처에 맞서 내가 얼마나 관용할 수 있는지, 그로써 어떤 법열을 얻어내는지 증명해 보이려고 사랑을 하는 거지요.
하지만 희옥에게 사랑은 '물처럼 가슴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닌, '단 한 번의 채찍질로 이쪽 편의 심지를 쪼개며 들이치는 것'이었기에, 주호백의 치매가 깊어지던 그 어느 날 이전까지는 전혀 존재치 않는 감정이었다. 그러다 칼로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느닷없는 주호백의 고백과 자신을 좀 도와달라는 울부짖음 속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느꼈던 사랑. 이에 대해 희옥은 '시간에 의해 저물던 일흔넷에 만난 놀라운 축복, 놀라운 고통의 시작'이라고 묘사하며, 자신이 가진 회한이 있다면 사랑이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자기희생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 것이라 고백한다.
내 아버지는 마음을 파고드는 노래가 한 곡 생기면, 유독 그 노래만 반복 재생하여 듣는 버릇이 있더랬다. 그 덕분에 나도 반쯤 흘려들으며 외워버린 노래가 대여섯 곡은 족히 될 것이다.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 김범수가 부른 구창모의 희나리, 안드리아 보첼리의 베사메무쵸 등. 잠시 삼천포로 빠지자면 네이버에 베사메무쵸 검색 시 카페글 어딘가에 아버지가 쓰신 "나는 왜 안드레아 보첼리의 베사메무쵸에 빠지게 되었나"라는 글이 링크(http://cafe.naver.com/ssial/245) 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렇게 반복 재생하여 흘려들은 노래 중 2-3년을 주기로 유독 자주 올라오는 노래가 있는데, 바로 심수봉이 부른 백만 송이 장미이다.
사실 아버지가 왜 그 노래에 빠져들었는지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아니, 어쩌면 내가 추측한 이유와 아버지의 그것이 정확히 포개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장미라니, 일단 그것부터가 너무나 유치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 장미를 백만 송이나 피워야 한다니, 이건 뭐 세상에 태어나서 쎄가 빠지도록 사랑만 하다 죽으라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랑이라는 것이 비단 감정의 일부로만 치부되어서는 안 되는, 그것을 뛰어넘는 위대한 행위라는, 어쩌면 그마저도 뛰어넘어 우리가 태어난 진짜 이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형의 손에 끌려 요양소 차를 향해 절룩절룩 그이가 멀어질 때, 혼자 남겨진 나는 한순간 흠칫, 몸을 떨었어. 오래전 그 전나무숲에서, 그이와 나의 시작과 결말을 이미 내가 다 보았었다는 걸 깨달았거든. 사랑이 시작될 때 사랑이 끝나는 걸 암시받은 셈이었어. 누가, 어디에서 보내오는 예시란 말인가. 나는 자문해봐. 어떤 우연한 찰나, 인연의 길에서, 절대적 가치의 생성과 소멸이 어떻게 그처럼 동시에 신호를 보내올 수 있는가. 지금도 잘 모르겠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를 예언자로 만드는 일인지도 몰라. 제 욕망 때문에 예시를 무시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게 문제겠지. 이별의 슬픔은 그것에 대한 벌일 거야.
때때로 사랑은 우리를 신의 영역 어딘가에 닿도록 만든다. 그 어떠한 과학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징후들은 백만 송이 장미의 노랫말처럼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주기만 할 때, 혹은 진실한 사랑에 대해 고민하며 괴로움의 눈물을 흘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섬광처럼 나타나곤 한다. 비록 그 징후는 찰나보다 더 짧은 순간 나타났다가, 깊게 음미할 틈도 주지 않고 사라지고 말지만, 희옥의 표현처럼 느닷없이 심지를 쪼개버리는 까닭에 무엇보다 강렬하게 남기 마련이다. 사실 세상에 태어나 신의 영역 어딘가에 애써 가닿을 필요는 없겠다만, 그로 인해 세상을 보는 깊이와 넓이가 한 뼘씩 성장할 수 있다면 이보다 큰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싶다. 결국 탄생 이후로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에 대한 자문을 눈 감기 직전까지 멈출 수 없으니 말이다.
고착화시켜나가는 기억들은 대부분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시간의 순차적인 선후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시간대의 일이라도 어떤 건 까맣게 잊었고 어떤 건 고착화됐다. 가령 낙일암에 머물 때의 수많은 기억들 중, 김가인이 붙잡혀가던 일이나 이철성의 추락사 등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내 모습이나 우물가의 반짝이던 햇빛 따위는 시시콜콜 기억하는 식이었다.
치매가 깊어가며 주호백이 자신의 생을 기억하는 방식은 내게 아주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인생에서 우리가 겪는 큼직큼직한 사건들은 대부분 예고편 없이 불쑥 찾아온다. 별안간 들이닥친 슬픔 앞에, 놀람 앞에, 두려움 앞에, 나는 얼마나 절망했던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잠식당해 스스로를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찍어가며, 나를 잃고 지낸 많은 날들이 결국엔 사랑 하나 가르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주호백이 겪어야 했던 악몽 같은 사건들이, 그를 향해 미소 짓던 희옥을 더욱 반짝이게 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책장을 덮고 나는 사랑하고 싶은 강렬함에 사로잡혔다. 지금보다 더 크게, 지금보다 더 많이. 가슴 저 밑바닥이 나도 모르게 넓어짐을 느끼며 지금 이렇게 정체되어서는 안된다는, 방향은 알 수 없지만 어딘가를 향해서든 나아가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내어주고, 내어줌 가운데 나 자신은 더욱 넓어짐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싶었다. 결국 우리의 생은 다른 누군가와 오롯이 만날 때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이므로. 무릇 사랑이어라.
2016년 7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