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욱_위험한 독서
공식 서류와 해야 할 일을 계획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학사일정은 내게 '유학생'이라는 신분을 부여했다. 약 3년 전부터 그랬으니 지금은 받아들이고 이미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나는 아직도 내게 본업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하는 질문을 한다. 직업이라는 것을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혜택과 동일시해온 탓에 TA로 일하며 얻는 수입은 그저 용돈 정도로만 치부해버린 탓도 있고, 집착 수준으로 지켜온 공부의 길에 대한 애정이 조금 식은 탓도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더더욱 읽고 쓰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나 자신이 환경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을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내가 가장 나 답다고 느끼는 순간이며,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는 순간이다. 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가면 갈수록 내가 아닌 것들로부터 극명하게 떨어져 나오는 느낌,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속한 상황과 환경에 가장 잘 스며들어 있는 느낌. 결국 '나'를 알지 않고 '나'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그래서 또다시 온전한 '나'로 돌아가는 몰입을 위해 책을 찾는다.
작가와 '만난다'는 것
대학교 때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심리치료 수업을 들으면서 내게 '만난다'는 단어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갈등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의 오해가 풀리는 순간, 분노로 치달았던 극도의 부정적 감정이 해소되는 순간, 심지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까지도 모두 '만난다'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만난다'는 단어에 의해서만 설명이 가능했다.
책을 읽는 것은 분명 홀로 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이야기 속 등장인물을 쫓으며, 그들의 대화를 곱씹으며, 나는 작가와의 내밀한 만남을 주고받는다. 이 책의 첫 번째 단편인 <위험한 독서>가 그랬고, 독서 치료사라는 직업부터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나는 책으로 마음의 병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사람이다.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하듯 나는 피상담자의 심리상태를 체크한 뒤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한다. 모든 약효의 팔십 퍼센트는 플라시보 효과다. 플라시보 효과로 치자면 책만한 물건도 없을 것이다. 부작용도 거의 없다. 중독?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 작가는 분명 책 속 활자가 주는 치유의 힘을 온몸으로 겪어보았을 것이다.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마치 이 사람이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람이라도 되는 듯 치열하게 감정을 주고받던 나의 관계 맺기 패턴이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으며 끝났던 것처럼, 신앙의 눈높이를 세상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몰라 그저 스스로를 틀 안에 가두려 애쓰다 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를 읽고 더 당당히 나를 드러낼 수 있던 것처럼. 책 속 활자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자아를 세상과 마주하게 했고, 그 안에서 미숙함을 인정하도록 했으며, 아주 작은 불이익에도 파르르 떨던 나의 일부분을 알 수 없는 힘으로 포용토록 했다.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 당신의 독서목록은 그 자체로 당신의 자서전이고 영혼의 연대기이다. 교육론의 고전 <에밀>을 집필한 루소가 제 자녀들을 고아원에 보냈다는 가십은 들은 자리에서 웃고 잊어라. 학장의 어린 딸 앨리스를 위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과 교수 루이스 캐럴이 독신으로 살지 않았다면 과연 그런 책을 펴냈을까 하는 공상은 가급적 빨리 접어라. 독서를 통해 당신이 발견해야 하는 것은 교묘하게 감추어진 저자의 개인사나 메시지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니까.
김경욱은 저자의 개인사는 재빨리 잊으라고 충고하지만, 결국 내가 만난 것은 책 읽기를 대하는 작가 자신의 자세였다. 그는 분명 읽는 행위에 빠져 사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관계를,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책이 필요한 사람.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인데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내게 세 번째 단편 <천년 여왕>을 통해 이렇게 경고한다. 니가 '만났다'라고 말하는 것은 저마다 다른 역사와 다른 개성을 가지고 사는 것 같은 우리가, 그리고 그런 우리의 이야기가 결국엔 서로 닮은꼴을 하고 있어서라고. 그저 그런 것뿐이라고.
탈고한 원고를 보여주면 아내는 진심 어린 상찬을 건넨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본 듯하다고. 그리고 어김없이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작가와 작품을 들이댔다. 책을 찾아 읽어보면 아내의 지적은 어김없었다. 나의 낙담과 아내의 격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반복이었다.
전혀 다른 줄거리를 가진 여덟 개의 이야기들이 내 안에서 서로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했다. 세월이 자신에게 남긴 건 공중관람차에서 곱씹을 추억과 추억을 떠올리며 울 수 있는 자유뿐이라는 <공중관람차 타는 여자> 수진과 아내의 대리 출산을 곁에서 지켜보는 <달팽이를 삼킨 사나이>,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방어하고 삶의 궤도를 일탈하는 것은 자연스레 금기된 <맥도날드 사수 대작전>과 그런 일탈을 감행하는 <고독을 빌려 드립니다>, 바쁘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과 단절된 듯 보이나 결국 자기만의 방식으로 맞서고 있는 <게임 규칙>과 그 안에서 순응하며 끝까지 차오른 회의감에도 이전 기성세대를 답습하고 있는 <황홀한 사춘기>. 모든 이야기가 알 수 없는 슬픔을 담고 왔다.
결국 또다시 나
독서는 위험해. 자신을 돌아보게 하니까. 가차 없이 돌아보게 하니까.
마지막 작가의 말에 적힌 첫 구절은 너무 날카롭고 정확해서 부정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지 않았다.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가차 없다는 표현에 이미 나는 온몸으로 공감하고 있더랬다. 그러면서도 어그러진 나를 자꾸만 책 속 활자를 통해 들여다보는 까닭은, 결국 괴로운 만큼 세상을 향해 조금씩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나를 느끼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나'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책 읽기의 힘을 또다시 경험하며, 온전한 몰입의 순간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이 행위를 언제까지고 지속하고 싶다. 비록 경제적 혜택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일이 오히려 나의 본업처럼 느껴지는 요즘.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싶어 지는 것은 분명 나를 더 알아가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2017년 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