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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영 Jul 28. 2017

Amor Fati!

어빈 D. 얄롬_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500 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읽으려면, 더군다나 어빈 얄롬의 작품이라면 그 어느 때보다 긴 호흡이 필요하다. 이미 이 책을 손에 받아 든 건 1월이었지만 학기가 마무리되는 4월까지 책장을 펼칠 수 없던 이유이다. 특히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는 1992년에 출판되어 장기간 베스트셀러의 인기를 누리다가 2006년에는 양장본이, 2014년에는 개정판이 인쇄된 어빈 얄롬의 고전 작품으로, 그 어느 때보다 기대가 컸다.  


정신분석의 기초로 평가되는 대화기법의 창시자인 요제프 브로이어는 상담가로, 영원 회귀로부터의 허무주의를 이야기하는 철학자 니체가 내담자로 등장하는 소설. 이쯤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설정인데, 브로이어의 제자쯤 되는 역할로 프로이트까지 등장해주니 심리학에 잠시라도 발을 들였던 사람이라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책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나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 


시간이 흘러 결국 우리의 삶이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우리는 지나간 시간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마지막 순간에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무엇'이 대체 '무엇'인지 미리 알 수 있다면 그 '무엇'을 위해 더 열심을 다해 살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의 순간까지 내딛지 않더라도 다만 10년 뒤, 20년 뒤의 나를 가늠해볼 수 있다면 좀 더 분명한 기준으로 삶을 단단히 세울 수 있지 않을까. 간혹 오지도 않은 미래를 어슴프레 상상하며 그때의 후회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현재의 선택을 이어가는 것은 아닌지 곰곰 생각해본다.   


"거룩한 것은 진실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입니다! 자기를 탐구하는 것보다 더욱 신성한 행위가 있습니까? 누군가는 제 철학적인 작업이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이라고 반박하겠지요. 제 입장은 계속해서 바뀌니까요. 그렇지만 화강암처럼 단단한 문장이 하나 있어요. 바로 '너 자신이 돼라'는 겁니다. 그런데 진실 없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선택마다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에게만 고유하게 할당된 '존재의 목적'을 찾는 것이다. 남들보다 유독 눈물이 많은 이유,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 지적인 것에 쉽게 현혹되는 이유, 감정의 반응보다 생각이 느린 이유, 새로운 가구 배치나 집안 꾸미기에 열광하는 이유, 느닷없이 캐나다로 유학을 오게 된 이유... 등. 어쩌면 사소한 그 이유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다 보면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는 더 큰 이유, 어쩌면 존재의 목적일지도 모를 그것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오늘은 두 번째 화강암 문장을 말해드리지요.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무엇이든지 결국 나를 강하게 만드나.' 그러니까 '내 병은 축복이다'라고 고쳐 말할 수 있겠군요. 


그러고 보니 의문을 품게 되는 모든 과정 과정이 마치 신이 내게 배움을 주기 위한 학습 장치 같다. 그래서 거룩한 것은 진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화강암처럼 단단하게 꼭 쥐어야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 더 나아가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무엇이든지 결국 나 스스로를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이 큰 울림을 가지고 다가온다. 


진짜 나와 나인 척하는 나


인간의 믿음과 행위가 이해되려면, 우선 인습과 신화, 종교와 같은 것을 쓸어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이후라야 그게 무엇이든지 선입견 없이 인간이라는 주제를 탐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36년을 살아온 지금까지도 그랬고, 그 어떠한 과학이 발달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게로 가 닿는 그 과정만큼은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나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정의 내리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자기 검열 과정을 요구한다. 내가 믿는 종교가 나인지, 내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나인지, 생계를 위해 택한 이 직업이 나인지 그 경계는 참으로 모호하다. 내가 하는 일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기 위해 애써 분리를 시도하더라도 직업을 통한 크고 작은 뿌듯함이 주어질 때면 그 경계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아직도 내 질문을 회피하는군요.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살았나요? 아니면 삶에 의해 그저 살아진 겁니까? 당신이 선택했나요? 아니면 선택당했습니까? 삶을 사랑합니까? 아니면 후회하나요? 내 질문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겁니다. 삶을 다 소진했습니까? ...... (중략)..... 결코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슬퍼하면서 힘없이 서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이 인생이 오롯이 나의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인생이라 명명한 이것조차 시간과 공간의 한정판으로밖에 경험할 수 없으니 더욱 그렇다. 


"날고 싶어 하는군요. 하지만 날고 싶다고 당장 날 수는 없지요. 내가 먼저 걷는 법부터 가르쳐야겠군요. 걸음마를 배우는 첫 번째 단계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타인들에게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 겁니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보다 남의 말을 듣는 것이 훨씬, 훨씬 더 쉬우니까요." 


결국 더 내 안으로 파고들어야만 한다는 결론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 무조건 필요하다. 처음에는 온 갖가지 잡다한 영상들이 머릿속을 꽉 메운다. 언어로 처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각한다'는 이 행위가 이토록 단순할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생각한 것을 타인과 나누며 언어로 풀어지고 나면 한없이 복잡해지면서 말이다. 어느 정도 잡념들로부터 분리되는 시점에 이르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모든 감각들로 의식이 분산된다.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태양의 온기, 앉은 자세에서 비롯된 편안함 내지는 불편함에 결국 그 3차원적인 감각들이 나 자신인 것 같으면서, 동시에 나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은 자유로움이 몸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내 안의 힘 


오로지 당신 자신이 되어야 할 의무만 있지요. 강해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확장시키기 위해 오로지 타인들을 이용할 겁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아주 많은 순간 타인을 이용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만 보더라도 그렇다. 스스로 의미 있게 존재하기보다 내가 아닌 타인에게서 나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물론 때때로 타인에게 투사된 나를 보며 자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청동으로 만든 명패, 빈에 있는 진료실, 어린 시절의 집, 베르타, 이 모든 것들은 지금도 원래 있던 자리에서 아무 일 없이 존재하고 있어. 이것들 중 어떤 것도 꼭 나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야. 나는 얼마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는 우연적인 존재일 뿐이지. 나는 베르타의 드라마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도 아니야. 그건 우리 중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그건 주연배우조차도 그렇지. 나도, 두르킨도, 앞으로 그녀를 맡게 될 어떤 의사도 그녀의 무대에서 영원한 주연 배우는 아니야. 


누군가에게 나의 의미가 아무리 심오하고 원대해봤자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타인의 무대에서 나는 또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는 우연적인 존재라는 것은, 애써 쌓아온 나의 사회적인 시선과 관계에 공허함을 불러일으켰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직장 상사나 교수가 나에 대한 긍정적 시선을 거두지 않게 하기 위해, 사랑받는 친구, 선배, 후배가 되기 위해 나를 죽이며 살아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타인의 인생 무대에서 부질없는 노력을 하느라 정작 돌아보지 못한 나의 삶, 나의 인생, 나의 무대.   


한 가지 분명하게 느낀 건 자기 인생이 자신을 삼키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세. 그렇지 않으면 마흔 살에 이르러 자기가 진정한 삶을 살지 못했다고 느끼게 될 테니까. 내가 무얼 배웠냐고? 아마 현재를 진실로 사는 것이겠지! 그래서 쉰 살이 되어 후회하며 마흔 살의 시절을 회상하지 않도록 말일세. 


결국 돌고 돌아 '나 자신이 되는 것'의 중요성만을 위해 500 페이지가 넘는 책장을 넘겼다니 조금 허무해질 것도 같았다. 니체가 이야기하는 '신은 죽었다'와 '허무주의'가 가지는 진짜 속뜻과는 별개로 이제는 정말로 허탈해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 버리면 마음을 복닥거리게 만드는 세상의 모든 일과 그 안에서 내가 취해온 무수한 선택들이 의미를 잃을 것 같았다. 존재의 목적을 찾는다는 것은 그저 허무맹랑한 만용이다. 하지만 심리학자답게 작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상하군요. 하지만 내 생애 처음으로 가장 깊은 내면에서 나의 고독을 드러냈을 때, 바로 그 순간 그 고독이 눈 녹듯 사라지다니! 내가 다른 사람과 접촉해본 적이 결코 없었다고 당신에게 말했던 그 순간이야말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접촉하도록 허용해준 최초의 순간이죠. 엄청난 순간이군요. 마치 아주 커다란, 내 속의 얼음덩어리가 갑자기 쩍 갈라지면서 산산조각 난 것 같아요. 


그것은 다름 아닌 '접촉' 그러니까 '만남'이다. 지금 여기,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에서 마주함이 만들어내는 커다란 울림. 그 순간에 우리는 깨어짐과 회복됨을 모두 경험하게 되는 셈이다. 만남의 순간에만 주의를 집중하면 타인의 무대와 내 것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져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로부터도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절망에 빠졌습니다'를 '이렇게 내가 절망을 주체적으로 의지했습니다'라는 말로 바꿈으로써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을 당신에게 가르치려 했지요. 


거기에 더해 즐겁지 않은 만남을 통해 경험되는 고난까지도 그것을 이용해 나의 심원에 더 가까이 가 닿을 수 있으므로 삶의 태도를 바꿔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가슴이 뛴다. 인생에 있어서 모든 고난이 자취를 감췄을 때를 생각해보라! 그 이상 삭막한 것이 없으리라!"는 니체의 말처럼 고난과 절망은 분명 내 생을 더욱 생기 있게 만드는 깊은 배움을 선물할는지도 모른다. 



2017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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