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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드러머 Dec 26. 2021

좋은 목소리

다른 사람의 편지를 써주는 대필 작가로 일하고 있는 테오도르는 정작 본인은 와이프와 이혼한 채 외로운 삶을 살고 있다. 어느 날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를 만나게 된 테오도르는 다시 행복을 찾기 시작하고 급기야 사만다를 사랑하게 된다. 영화 '그녀(Her)'의 이야기다. 어떻게 인공지능과 사랑할 수 있어?, 말도 안 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만다의 목소리를 연기한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난 그녀의 외모만큼이나 목소리도 좋아한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목소리가 있다. 목소리는 지문처럼 사람의 특질을 구분해주기 때문에 범죄 수사에 활용하기도 하고, 외모처럼 매력을 나타내주기 때문에 광고나 이북 서비스에 활용하기도 한다. 유명인이 이북 읽어주는 서비스는 이미 대중화됐다. AI를 활용해서 자동으로 목소리를 생성해 서비스해주는 스타트업이 최근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손석희나 트럼프 같은 유명 인물의 목소리를 인공지능에 넣어주면 텍스트를 이들의 음성으로 전환해 들려준다. 물론 자기 목소리로도 똑같이 할 수 있다. 그리고 보이스를 전문적으로 잡아주는 레슨도 일반화되고 있다. 소리의 중요성이 커지고 그것을 활용한 산업이 점차 커지고 있는 추세다.

목소리는 그 사람의 매력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을 때를 상상해봐라. 사랑 고백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홀딱 반할만한 목소리로 고백을 듣는 것과 사랑이고 뭐고 도망치고 싶은 목소리로 고백을 듣는 것은 다르다. 목소리 때문에 고민 상담하는 사람도 많다. 중학교 때 선생님 한 분은 목소리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남자는 세 가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목소리였다(두 가지는 아마 머리와 신체의 건강이었을 것이다). 돈도 있고 배경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왜 하필 목소리인가 그때는 의아해했었다.

녹음해서 들은 내 목소리는 너무 어색하다. 말을 할 때 들리는 내 목소리와 녹음해서 듣는 내 목소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이름처럼 내 것이지만 남이 더 많이 쓰는 것과 같다. 목소리는 그래서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상대를 위한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목소리 좋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다. 중고등학교 때 전화 통화를 하면 내 목소리가 좋다며 친구들이 놀라곤 했었다. 사실 중고등학교 시절의 남학생의 대화란 팝콘이나 뻥튀기할 때의 소리처럼 날아다닌다. 하지만 집에서 통화하는 목소리는 차분할 수밖에 없는데, 내 전화 목소리가 친구들한테 꽤 좋게 들렸었던 모양이다(모두 남자친구들이다. 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여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다). 목소리가 좋다는 얘기는 발표 현장에서도 많이 들었었다. 언젠가는 발표를 끝내고 내려오는데 담당자가 직접 나에게 찾아와 목소리가 좋았다는 말을 해줬었다(이 분도 남자다).

나도 좋은 목소리를 좋아한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첫 미팅에서 만난 여자는 꽤 못생겼었는데도 계속 만났었다. 순전히 그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진지하게 만나지 말고 전화만 하자고 했을 정도였다. 밴드에서 보컬의 목소리 톤은 무척 중요하다. 보컬의 목소리 톤에 따라 세션들의 연주가 달라진다. 그래서 난 밴드 보컬을 뽑을 때, 가창력보다 보컬 톤을 먼저 본다.

좋은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떤 목소리는 방금 막 구워낸 빵의 냄새처럼 풍요롭고 달콤하다. 또 어떤 목소리는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잠들기 전 어머니의 자장가같이 아스라한 목소리도 있다. 안전감을 주는 목소리가 있고 따뜻한 목소리가 있다. 어떤 목소리는 감각을 깨워주기도 한다.

사람의 몸 중에 가장 늦게 늙는 게 목소리라고 하니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 매력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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