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림질

나에게 주는 반듯함

by 헬렌

아침 7시 등교하기 전, 엄마는 매일 아침 교복을 다려주셨다. "엄마, 나 그냥 대충 옷 털어서 입고 갈래. 그런다고 뭐 안 바뀌어." 엄마는 조금만 기다리라며 나보다 발 빠르게 움직여 빳빳한 교복을 입혀주셨다. 기숙사 생활하는 1년 동안은 다리미를 본 적도 없었다. 부모님은 나를 불쌍한 새끼 강아지 보는 듯하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새벽에 일어나는 게 더 중요했다. 어차피 입고 바로 빨 건데 굳이 왜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셔츠, 근래는 '구겨진 멋(맛)'이라는 단어를 끼우고 나타난다. 단정함과 각을 보여주고 싶은 나는 이제 이 구겨짐을 나에게 입힐 수 없다. 구겨진 종이를 다시 펴서 글씨를 쓰고 싶지 않은 것처럼, 애초에 말끔하길 바란다. 그래서 작년에 핸디형 스팀다리미를 구매했다. 퇴근하고 다림질하기 귀찮아할 걸 알았지만 그래도 공이라도 들여보고 싶었다.


사용한 지 1년. 이제는 주름도 보기 싫어졌다. 심지어 구겨져도 괜찮다는 셔츠를 샀는데 그것마저 펴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옷을 입은 나보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의 형태로 남아있다. 이때 일그러져 있는 것은 샤워 후 스킨/로션을 바르지 않은 것처럼 정돈을 마치지 않은 것을 곁에 두고 있는 거 같다. 내가 나를 대할 때 예의 바르게 대해야 하는 것처럼, 나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


전기다리미를 들였다. 진작 했어야 했다. 사고도 쓰지 않을 내가 염려되어 엄마에게 물어봤었다. "엄마, 나 다리미를 사고 싶은데 내가 해도 괜찮을까?" 소재가 다양해서 여러 번 해보면서 온도를 익혀야 하는데, 회사 출퇴근하기 바빠서 못할 거 같으면 그냥 있는 걸 쓰라는 답이었다. 사실 상상했다. 하얀 셔츠를 올려놓고 다리미를 그대로 뒀다가 부채 펼쳐진 모양으로 다리미가 옷에 들러붙어있는 것.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지만 왠지 익숙하고 나에게 돌아올 거 같은 현상. 하지만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왜 해야 하는가 떠올렸을 때 반듯한 것을 나에게 주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배워서라도 하는 게 맞았다.


해냈는가? 당연하다. 나는 내가 할 줄 알았다. 근데 이 행위가 재밌을 줄은 몰랐다. 셔츠 4벌을 40분간 다리고 새벽이 되어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이 되어서도 떠올라 다시 해보고 싶고 더 잘해보고 싶고 다른 사람의 옷도 다려주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어쩌면 내가 전생에 혹은 미래에 세탁소 사장님이었을 수도 일지도 모르겠다는 상상까지 했다. 처음부터 옷에 선을 남기지 않고 다린 건 아니었다. 앞뒤의 라인이 맞지 않아서 물을 뿌리고 다시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굴곡 없는 옷이 나에게 준 쾌감은 다리미가 일자로 세워졌을 때 나는 치익 소리처럼 개운했다.


지금 당장도 하고 싶지만 이걸 위해 옷을 여러 번 빨 수는 없다. 누군가 나에게 옷 좀 다려달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입고 문 밖을 나설 모습을 기대하며 오늘 하루를 잘 보내고 오라고 인사하고 싶다. 지금 이 마음, 우리 엄마가 나에게 줬던 행위로써 주었던 선물이었다. 그것을 나는 이제야 알았고, 나는 그것을 이제는 나에게 그리고 주위에 보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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