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단둘이 3일 밤을 보내며
엄마는 나와 함께 서울을 돌아다녔던 7년 전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서울에 있는 모든 옷을 보겠다고 다짐한 듯 새벽부터 움직였다. 동대문 근처에 있는 밀레오레, apm 등 중국인들이 휩쓸어간다는 매장이 즐비했다. 외국인 사이 우리도 껴있었다.
우리 부모님의 인상은 짙다. 아버지는 색소폰 공연을 하실 때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같은 패턴 다른 소재로 된 바지를 여러 벌 갖고 계신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혹시 외국(특히 러시아)에서 오셨어요? “ 혹은 “예술하세요?”라는 말을 자주 들으셨다. 샛노란 머리를 하고 머리를 치켜올린 후, 옷은 항상 검은색만 고집하셨다.
엄마는 일주일에 6일을 교복만 입는 나에게 야해 보이는 옷을 사주셨다. 니트가 망처럼 늘어져 있거나 크롭에 목선이 옆으로 퍼져 있었다. 이걸 입은 나를 누가 쳐다보기 이전에 내가 나를 보는 게 남사시러워서 차마 꺼내지도 못하고 누가 봐도 평범한 옷을 사 입기 바빴다.
엄마가 사준 옷은 대충 10년이 지난 지금 빛을 바라고 있다. 나이가 들면 딸은 엄마랑 비슷해진다고 하더니, 누가 봐도 닮게 바뀌었다. 어제는 엄마와 함께 고속터미널역에서 쇼핑을 했다. 엄마는 20-30대를 겨냥한 매장 앞에 서서 “여기 유명한 곳이야?”라며 짐을 나에게 맡겨두고 30분 넘게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나에게 “이거 어때?”라며 보여준 옷은 한쪽 어깨가 내려간 형태였다. “엄마, 근데 그거 입으면 팔 돌릴 때 불편할걸.” 이제는 엄마에게 의견도 내놓을 수 있는 자가 되어 엄마가 옷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엄마는 40대가 되어서도 나를 유모차에 끌고 다니며 청자켓과 청바지 세트에 안에는 검은색 배꼽티를 입었다. 이를 본 아빠 친구들은 엄마 흉을 보고 아빠는 엄마에게 ”제발 철 좀 들어라. “라고 했지만, 엄마는 ‘싫으면 뭐 어쩔 건데’를 시전하며 바꾸지 않았다. 이런 엄마가 좋았던 아빠는 지금까지도 엄마가 아침에 화장하고 옷 고를 시간을 넉넉하게 주고 어딜 가든 엄마를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나 있다.
엄마는 다른 매장에 가서 기어코 어깨 파인 옷을 사들고 왔다. 이제 나는 엄마의 열정을 따라가지 못해 앉아서 기다려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거 샀다~ 입다가 별로인 거 같으면 줄게. 같이 입자.” 엄마와 나는 이제까지 옷을 공유하며 살았다. 어쩌면 동방예의지국인 대한민국에서 당당히 나시를 입고 돌아다닐 수 있었던 건 엄마의 조기교육 덕분일지도 모른다.
절대 세상의 시선에 기죽지 않겠다는 엄마와 이런 엄마를 아낌없이 지원해 주는 아빠, 그리고 이 사이에 엄마를 닮아가고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길 바라는 나. 오랜만에 같이 지내보니 안 닮은 게 없는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