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를 할 수 있다는 것
불편한 일이 있어도 하루 안에 잊어버린다. 때때로 혼자 있을 때 악감정이 팍 치고 올라 속으로 화를 낼 때도 있지만 한두 번이면 그만이다. 이것보다 더 제어가 되지 않은 것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병에 남은 스티커 자국 같은 들러붙는 감정이다. 스티커 자국을 지워내는 데 베이킹파우더가 쓰이는 것처럼 감정엔 시간이 있어야 한다.
본가에 다녀올 때마다 내가 부모님을 바라보았던 시선이 기리 남는다. 오랫동안 쳐다본 건 따지고 들 때뿐이었다. 가치 있음을 몰랐다. 매일이 반복되어 떠올려볼 기회가 없었다. 부모님과 나의 사이를 유리병과 스티커에 비유하자면, 나는 포장이 되기 전 병 안에 들어있는 스티커였는데, 이제는 부모님 바깥을 지키고 함께 하는 나름 포장으로 역할을 하려는 애가 되었다.
끈끈해졌다. 얼마 전 엄마와 인간관계에 대해 말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이 2년에 한 번씩 바뀌는 거 같아."라고 했더니, 엄마는 "보고 싶을 때 또 찾아가서 보면 되잖아. 없진 않잖아."라고 했다. 이어, "살아있잖아."라고. 우리 엄마에게 사람과의 멀어짐은 생명선과 이어졌다. 내가 원한다고 다가갈 수도 없는 곳에, 내 감정 속에서만 나풀대는 상대.
나는 이제껏 가깝게 했던 누군가와 멀어질 때 영원히 만날 수 없음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가 그리워지면 "어쨌든 살아는 있겠지."라며 추억을 회상했다 가라앉힌다. 잘 사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죽진 않았으면 하는 바람. '그래도 살아있으면 뭔들 하겠지.'라는 믿음.
누구를 보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얼굴 주위를 살핀다. 만남 후엔 스티커를 떼었다 붙여냈다 반복하는 것처럼 그를 새겨본다. 얼굴이 바뀌었구나, 말투나 성격이 전과 다르구나. 내가 없는 동안 변화했구나. 이 정도의 벅참을 느끼는데 이제야 만난 건 내 최선이었을까 하는 반성 혹은 남는 게 없으니 이젠 안 봐도 되겠다 하는 깨끗함이 있다.
이제는 나와 동년배인 사람들을 만나도 달라진 것을 체감한다. 지구 위의 땅이 바다 위에서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듯이 무언가 바뀐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웃는 정도에 따라 얼굴이 서로 닮아가고 바뀌어 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나는 그를 보며 사람은 혼자가 아닌 다른 생명으로 가꾸어져 간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본 우리 부모님은 아직 40대에 머물러있는데, 벌써 20년이 넘게 흘렀다. 포근한 눈빛에 온화한 말투를 가진 사람이 되었고, 셀 수 있던 주름은 셀 수 없게 얼굴에 박혀버렸다. 90대 노인이 60대 자녀에게 아가라고 부르는 것처럼, 내가 보는 부모의 모습도 이상하게 과거에 머물러있다. 누군가의 나이듦을 인정하는 건 당연하면서도 아프고 때로는 기쁘고 어쩔 땐 쓰리다.
할 수 있는 건 내 눈으로 본 모습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 그리고 인사하는 것이다. 사람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생물이라는 것은 복받은 일이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나 왔어, 보고 싶었어, 잘 가, 조심히 들어가, 연락해"라고 나타낼 수 있으니. 어디선가 상대에게 안녕이라고 인사할 수 있는 건 정말 다행이라는 말을 들었다. 멀어질 때의 안녕. 내가 상대에게 인사할 수 있는 그 찰나의 순간이 가슴 깊이 남는다는 걸 깨닫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