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헬렌 Dec 14. 2023

시들어가는 곳

나의 무언가는 이미 없어졌다.

퇴근 후, 엄마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저번에 이 화분 봤지? 이제 곧 내 키만큼 클 거 같아."라며 자랑했다. "물을 주긴 하나 보네? 죽을 줄 알았더니." 하하 웃음소리를 내셨다. 분무기로 물을 뿌려줄 때마다 이파리를 세세하게 보는데, 오늘은 뿌리 근처에 노란 물을 들인 잎이 있었다. 이럴 때마다 줄기를 자르지 않고 다시 살아나길 기다렸지만, 이제껏 이겨내고 다시 연둣빛으로 돌아온 잎은 없었다.


막 줄기에서 뻗어 나온 잎처럼 힘이 솟아날 때가 있었다. 5년 전, 그때의 남자친구와 함께 놀이공원에 갔다. 무엇을 입을지 말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하얀 모자에 하얀색 반팔티 그리고 검은색 반바지로 똑같이 입고 나왔다. 그때의 체감 온도는 기억나지 않는다. 반면, 온갖 것을 다 타보겠다고 발바닥에 스프링이 달린 것처럼 뛰어다녔던 다리의 힘은 근육이 기억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그는 나와 함께 기다렸다가 내가 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힘은 노란 잎처럼 사그라들었다. 올해 11월 말, 이 씨와 그 놀이공원에 다녀왔다. 사람이 많아 직원들이 놀이기구를 짧게 태워줘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기구가 덜 올라갔던 건지, 풍선이 가슴속을 꽉 채우는 것 같은 벅참이 없었다. 둥글게 앉아 아파트 키만큼 올라가 좌우로 움직이고 있는데도 나무 밑에 부는 바람처럼 시원한 공기를 즐겼고, 강 건너에 있는 아파트의 외벽을 보고 서울의 공기 오염을 떠올렸고, 평일 낮에 강 주위를 산책하는 사람을 보며 내 건강을 걱정했다. 다른 놀이기구 대기 중엔 한 남학생 덕분에 과거 회상을 했다. 기구에 앉은 그는 위로 몸이 올라갈 것을 두려워하며 격한 감정을 비속어로 내뱉었다. 한때 단어를 고민하지 않고 말을 쏟아내기 바빴던 나를 회상하면서도, 그런 뜨거움을 가지고 있었던 내가 그리웠다.


그때의 뜨거움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술이다. 기억 속 나를 다시 끄집어내려는 것처럼, 오늘의 나도 행복하길 바라기에 무언가에 의존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작은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는 것처럼, 취기 있는 세상 속에서 내가 마음껏 생각하도록 내버려 둔다. 거기서는 토끼 같이 뛰어다니는 나는 없지만, 과거의 나를 부러워하는 내가 아닌 현재를 후회 없이 살길 바라는 내가 있다.


잘려나간 이파리는 이제 살아날 순 없지만, 이렇게 된 덕분에 남아있는 잎들이 더 영양분을 얻었다. 이처럼 나의 무언가가 사라져 줘서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떠올리게 되었다. 내 머리가 일을 잘 해준 덕분에 웃고 다녔던 기억을 지금도 추억할 수 있었다. 앞으로 나는 지금처럼 이파리를 떨구고 살아갈 것이다.

이전 03화 잘 사냐고 물어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