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강직한 나무처럼 우뚝 서있진 못했지만, 우리 집에 있는 스킨답서스처럼 가늘고 길게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견뎌왔다. 내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 나는 외로움을 느끼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안에 그리움이 있는 걸 몰랐다. 사람을 떠올리는 건 같이 있는 그 순간인 줄 알았다. 외로움 없이 혼자 잘 지내고 있었고, 평생 같은 방식으로 살아도 될 거 같았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알아챘다.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싶어지는 마음, 이 그리움이 사랑이었다. 누군가에 의지를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덩굴 같은 존재였다. 단단하다는 것은 혼자 잘 자라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붙들고서라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워하다. 술이 그리운 대상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딱 1년 전만 해도 한 달에 한 번 술을 마실까 말까 했다.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을 안 마시면 '이런 날도 있네'하고 놀란다. 이제는 술약속을 거절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혼자 집에서 술을 마시는 걸 피하려 애쓴다. 속 안에 있는 피부에 긁힌 상처처럼 쓰린 감정을 씻어내지 못했을 때 술을 찾는다. 상처가 옅어지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이런 시간을 가지기엔 다음 날이 오기까지 너무 빠르다. 그래서 술로 잠시 잊고 이 생각을 주말에 몰아서 한다. 잠시나마 정상적인 척을 하려면 술이,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안정적인 상태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순간적으로 빠르게 선택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나와 곁에 있던 상대가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떠올린다. 화나는 순간이 떠올라 박차게 힘을 주고 걷고 있다가 강아지가 귀를 나팔거리며 뛰는 모습을 보면 힘이 축 빠지고 해맑게 웃으며 그 악몽을 멈추게 되는 건, 내가 정말 화가 풀려서 그랬던 게 아니라 강아지를 보고 풀릴 만큼 큰일이 아니었다는 걸 인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보러 가는 길,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마주쳐 얼굴만 봐도 웃게 되는 건, 그 사람의 존재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제야 부모님을 사랑한다는 걸 깨닫게 된 건, 이제까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삶의 큰 부분을 담당하는 어려운 일을 위주로 이야기를 나누며 쉽게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표현해 본 적이 없었기에 부모와의 사랑이 그리 깊지 않았다고 느낀 것이다. 이것보다 더 많은 것이 내 속엔 미제로 남아있다.
나는 살면서 진도를 빼기 바빴다. 무언가 빨리 읽고 이해하고 새로운 걸 접하는 것. 그런데 이럴 때 놓치는 건 나 자신이었다. 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사람이라서 감정을 놓고 살아갈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나를 기계처럼 학습하는 도구로 여겼다. 그리고 남들을 따라가지 못하면 나무랐다. 그래서 사람이 얕아졌다. 후푹풍으로 돌아오는 씁쓸함에 '나는 왜 아직도 성장하지 못한 것인가, 언제 철드나'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마음이 있는 생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살아가야 했다.
앞으로도 나에게는 이런 시간이 필요할 텐데, 아쉽게도 하루는 24시간보다 더 길지 않고 회사에서 근무하는 시간은 8시간 이하로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 깊게 풀어내는 방법을 고안해내야 한다. 지금은 가만히 앉아서 가사 없는 음악을 틀고 따뜻한 옥수수차나 매실차를 마시며 앉아있거나 서있는다. 차후 그 어느 때에는 이 방식이 아닌 무엇이 나타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