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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렌 Dec 29. 2023

연말도 탄다

공허(空虛): 빌 공 / 빌 허

10년 전에는 봄을 탔다.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 중 하나. 해가 질 무렵 하얀 시폰 커튼을 부드럽게 감는 바람. 내 몸도 같이 바람을 타고 올라가는 듯했다. 창가에 앉아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바라보곤 했다. 내 감정과 관계없이 바람은 일정하게 불었다. 겨울이 되면 전기장판 위에 포근한 이불에 감겨있는 길 원하듯, 봄의 그 바람이 기다려졌다.


어느 계절이 와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다. 봄엔 바람, 여름엔 시원한 물, 가을에 낙엽 밟는 소리, 겨울엔 눈이 뭉쳐지는 소리. 그런데 계절도 아닌 한 시기가 내 발목을 잡았다. 지난달보다 사람을 자주 만나는데도 여전히 나는 채워지지 못했다.


공허하다. 이전에 말한 언짢음과는 다르다. 오장육부는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겠지만, 내가 본 나는 장을 크게 확대해 둔 것처럼 속이 텅 비어있다. 숨을 크게 쉬어도 편안한 느낌보다는 빈 페트병에 바람을 호 불어넣는 거 같고, 겨울이불 안으로 들어가 몸을 빙빙 돌려도 이불이 찢어져서 바람이 들어오는 것처럼 허하다.


아무것도 해낸 게 없는 거 같다. 연간 회고를 하며 나의 성장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의 존재를 재고했는데도 나라는 존재가 투명하게 보인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은데 감정은 없어졌다.


우울증인가 의심도 들었다. 그런데 나는 우울한 게 아니라 감정에 색이 없어서 어떤 상태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우울은 짙은 파란색이라면, 지금의 나는 흰색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차라리 슬펐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내 감정을 타인에게 숨기고 살면서 이런 상태를 스스로 만들어버렸다. 글 쓰고 감정을 해독하며 꽤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온 줄 알았다. 말하지 않아서 남아있는 미꾸라지 같은 감정이 있었다. 잡아서 빼내지 않으면 계속 남아있는 거다.


어린애 같다. 말을 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사람이라니. 이제는 누군가 붙잡고 나에 대해 말하는 게 눈치 보인다. '쟤도 나처럼 바쁘겠지. 본인 신경 쓰느라 정신없겠지. 내가 힘들다고 말할 자격이 되나.' 이런 걸 따지고 있다. 어쩌면 서로가 필요한 상황일지도 모르는데, 말하고 거절당하면 되는데, 말을 꺼내는 것조차 시도도 안 했다.


상대가 나를 볼 때 '얘가 좀 힘든가 보구나.'라고 보는 것도 싫었다. 건강한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싱숭생숭한 나를 나에게 가두어 두었다. 나를 보고 웃었으면 했다. 나 때문에 상대가 웃지도 못하는 시간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상대도 웃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필요했을 수 있는데 나만의 주관으로 상대와 만날 시간을 만들지 않았다. 나의 이기심이었다.


거절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고 허하다고 말해보려 한다. 그런데 지금은 왠지 내 마음이 다 밝혀져서 그런지, 이제 막 해가 뜨는 것처럼 기분이 맑아졌다. 지금 시각은 오후 11시 42분인데, 내 속은 아침 7시 40분이다. 투명함에서 해 뜰 녘이 되었으니, 이 따뜻함을 안고 고이 잠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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