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 믿음을 지킨다는 것의 외로움과 의미
신념은 다수 속에서도 고요한 섬처럼 남는다.
지키면 외롭고,
버리면 나를 잃는다.
그 외로움 속에서
나는 내가 믿는 것을 선택한다.
나는 늘 나에게
정답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말을 꺼내기 전부터
“이게 맞는 말일까?” 하고 고민했고,
말을 꺼낸 후엔
“이걸 왜 이렇게 말했을까” 하고 돌아보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에게 솔직하려 애썼고,
생각이 이끄는 대로라도 꺼내보는 나였기에,
나는 나에게-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참 많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무엇을 하든
그 행동의 이유와 감정을 따져묻고,
그 순간의 나를 바라본다.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넌 왜 이래?”
그 말은 늘 나를 향한 물음이었고,
그 다음엔 꼭 이렇게 덧붙였다.
“맞아. 넌 너라서 그래.”
나는 이유를 모르는 자존감을 품고 살면서도
자꾸 나를 점검하고, 확인하고,
조용히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어떤 날엔
그냥 손을 본다.
늘 내 눈에 들어오는 이 손.
이 주름, 이 선, 이 굴곡은
정말 우연히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어떤 대답을 품고 있는 걸까?
계속 묻고 있지만 매일이 처음인 것처럼
아직도 답은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 손으로 뭐든 못 하겠어?”
손을 펴면 펴지고,
쥐면 주먹이 된다.
그럼 이 손이 할 수 있는 걸 하도록
내 발이 움직이면 되겠지.
그렇게 나는 또
나를 움직인다.
나는 결국
나를 찾아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웃긴 건 말이지,
나도 모르면서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향을 흘릴 때면
나는 또 내 향을 슬쩍 흘려보낸다는 거다.
아무 말도 아닌 말,
해답도 없는 이야기.
그러고는 혼자 중얼거린다.
“나도 모르는 걸 왜 이렇게 아는 척했지?”
그렇게 스스로를 질책하다가
또 질문하고,
또 반복하고,
결국 생각이 멈췄을 때
나는 조용히 이렇게 말한다.
“그래. 이건 표현이었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본다.
추워서?
무서워서?
좋아서?
모르겠다.
그건 그냥, 나무의 표현이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그 표현을 존중하는 순간
세상은 조금 덜 복잡해지고,
나도, 내 표현을 조금 더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도 내 표현을 한다.
혹시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흔들림 속에 있다면,
내 표현이 그에게
세상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