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 근처 카페, 잠시 커피를 마신다. 많은 사람이 창문 앞을 지나간다. 그들을 이곳으로 이끈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목적은 같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난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어떤 형식으로든 나 자신을 드러내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곳에 있다. 토드 로즈가 이곳으로 날 이끌었다. 그의 책 <집단착각>이.
<집단착각>의 메시지를 형상화한 이야기는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사기꾼 재봉사에 속아 알몸으로 거리를 행진하는 임금에 대해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누구도 말하지 않기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다. 임금도, 신하도 그리고 백성도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길 원하지 않는다. 재봉사는 옷감이 ‘선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고, 나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금이 벌거숭이라는 것을 알지만, 다들 침묵할 뿐이다.
카페 안은 붐비고 있다.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사람들이 카페로 들어오고 있다. 자연히 카페 안은 섞이지 않는 말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나는 함께 할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오기 전까지 생각에 잠긴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여기 한 집단이 있다. 집단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집단 구성원들은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것을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들 각자는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지만, 그들은 한 가지 때문에 침묵을 유지한다. 바로 많은 구성원은 나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각자가 가진 올바른 인식을 공유하지 않았기에, 다른 이들의 생각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런 예단이 침묵을 불러왔다. 그래서 당시의 지배적 이념이 그릇된 것이라도 다수가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그것을 지지하는 척하며 침묵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다. 개개인의 전체적인 상황인식은 올바르지만, 다른 이들에 대한 인식은 틀린 것이다. 집단의 구성원이 서로에게 가진 올바르지 못한 인식을 저자는 ‘집단착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런 불행한 상황을 유지하는 것은 침묵이고, 이것을 심화시킨 현상을 ‘침묵의 나선’이라 했다. 침묵은 생물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생존에 유리하기에 우리의 본능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이를 극복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저자는 이를 진화심리학, 뇌과학 그리고 심리학의 다양한 실험을 통해 보여준다.
답답함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피곤이 가신다. 아니 가셨다고 뇌는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실제는 피곤하지만, 카페인 때문에 피로를 못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유리창엔 커다란 모카포트가 그려져 있다. 그 각진 모양이 책의 표지를 떠올리게 한다.
<집단착각>의 표지에는 거의 삼각형에 가까운 검은색의 역삼각형이 있다. 밑부분은 무너져 내리고 있고, 넓은 윗부분에는 환호하는 인간군상들이 보인다. 역삼각형을 보는 순간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가 떠올랐다. 더 정확히는 <걸리버 여행기> 3부,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인 ‘라퓨타’다. 라퓨타의 주민들은 수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다. 이를 바탕으로 사색에 빠진다. 그러나 말이 사색이지 공상으로, 이들의 생각은 현실에서 멀리 있다. 중요한 현실적인 문제는 그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표지는 ‘라퓨타’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 다른 것이 섞여 있다. 바로 라퓨타와 연관된 도시 래가도다. 래가도는 라퓨타의 지배를 받는 육지 국가 발니바르비의 수도다. 어느 날 라퓨타를 방문한 어떤 사람이 그곳의 지식을 조금 배운 후 래가도로 돌아왔다, 그는 라퓨타의 지식으로 래가도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도시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황폐해졌다. 그런데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뒤에 있는 라퓨타, 더 정확히는 라퓨타의 지식은 무조건 옳다는 착각 때문에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단만, 무노디 영주만이 자신의 땅에서 예전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으로 무언의 항의를 보였을 뿐이다. 다른 이들은 그냥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래가도와 발니바르비라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것이 표지의 역삼각형 하단이 무너져 내리는 형상이다.
즉, 표지는 현실에 관심 없고 공상 또는 사색에만 빠진 주민들이 사는 공중에 떠 있는 ‘라퓨타’라는 섬을 역삼각형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비판 없이 라퓨타의 공상을 받아들이고 있는 래가도 아카데미 학자들과 이들에 감화된 들뜬 국민이 위쪽에 있다. 아래쪽은 무너지고 있는 발니바르비이다. 그리고 검은색으로 역삼각형을 채워 침묵을 표현했다. 이 모든 것을 하나에 담았다.
역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아직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가자고 했고, 그녀도 동의했다. 침묵은 의미 없고, 움직여야 했다.
이렇게 구성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원인으로, 저자는 테일러 주의, 가부장적 제도, 전제주의로 보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이 한 사람에 의해 집단이 좌지우지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가진 강력한 권위와 권력에 다수는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않고 입을 닫는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침묵은 우리의 본능에 깊이 새겨져 있기에 극복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황을 멈추게 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방안을 책에서는 길게 설명하고 있지만, 마지막 장의 아래 글로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다.
우리의 힘을 되찾자는 말은 공허한 구호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이며 실천적이며, 우리의 가슴에서 출발하는 외침이다. 인격적 조화를 이루기 위해 매일같이 헌신하며, 다른 사람의 신뢰에 스스로를 맡기고, 우리의 집단 착각에 틈을 내기 위해 노력할 때, 그 틈으로 한 줄기 빛이 스며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p376
이 방안의 중심에는 타인에 대한 신뢰가 있다. 타인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개인이 침묵을 깨고 옆 사람에게 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타인에 대한 신뢰, 이것이 어렵다는 것은 말콤 글래드웰의 <타인의 해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개인은 타인에게 신뢰를 먼저 보내고, 여기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그래야 집단착각이라는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다. 동화의 어린이가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외쳤듯, 우리 중 누군가는 외쳐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지금 광장에서 외치고 있다.
난 책을 읽고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근무가 끝나고 시청으로 왔다. 그녀가 왔고, 우리는 카페를 나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침묵이 아니라 외침이 있고, 최소한 서로 모르는 옆 사람에게 이 상황에 대한 신뢰가 있다. 그러기에 이렇게 많이 모였다. 여기서는 침묵의 나선이 아닌 신뢰의 나선이 펴져 있다. 외침이 더 커져 퍼져나가길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