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이하 메트 경비원)은 두 줄기의 이야기로 직조되어 있다. 하나는 저자인 패트릭 브링리의 개인사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이다. 이 둘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하 메트)에서 얽히고설킨다.
창밖은 어둡다. 저녁 봄이 바람에 흔들린다. 흔들림은 오후의 따스함을 흩날리며 지난 계절을 잊지 못한 찬 공기를 불러왔다. 댓글에서 더치커피를 봤다. 그 영향 때문일까? 테이블엔 더치커피가 놓여있다. 길게 생긴 유리 용기에 분쇄된 커피 원두를 넣고 찬물을 붓는다. 찬물에 우러난 커피 원액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진다. 방울이 모여 한 잔의 더치커피가 된다. 점적식이며 커피의 눈물이라고도 부른다. 짧게는 3~4시간, 길게는 8~12시간 걸린다. 소량 생산되고, 개인 카페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저자의 형, 톰은 암으로 스물여섯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저자는 스물다섯이었다. 형의 이른 죽음은 그를 변화시켰다. 그는 삶에서 한발 물러났다. <뉴요커>라는 유명한 잡지사를 나와 메트의 경비원으로 숨어들었다. 메트의 고요함으로 자기 삶의 외관을 둘렀다. 외부 세계를 차단했다. 차단되었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뒤돌아 과거를 철저히 회상했다. 이것이 그가 형을 애도하는 방식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상실로 인한 커다란 슬픔은 충분히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린다. 쏟아낸 충분한 슬픔은 다른 대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성공적인 애도라고 했다. 그의 애도는 성공적이었다. 메트의 고요함 속에서 점차 세상의 소음이 조금씩 들렸다. 그 소음은 그의 삶을 두른 고요를 끝내 무너뜨렸다. 10년의 애도 끝에 경비원을 그만두고, 그는 세상으로 나왔다. 그 사이, 아이들이 태어났고, 그들에게 그의 사랑을 쏟을 수 있었다.
이제 이런 순간들은 예전만큼 자주 오지 않고 그 사실을 인정하며 슬퍼진다. 위대한 그림은 경외감, 사랑 그리고 고통 같은 잠들어 있던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메자닌의 골동품들에 대한 호기심과는 다르다. 이상하게도 나는 격렬한 애도의 끝을 애도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내 삶의 중심에 구멍을 냈던 상실감보다 그 구멍을 메운 잡다한 걱정거리들을 더 많이 생각한다. 아마도 그게 옳고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p256
그의 개인사는 지금 마시는 더치커피와 닮았다. 오랜 시간 걸려 떨어진 한 방울 한 방울이 그의 충분한 슬픔을 연상시킨다. 지금 나는 그의 슬픔을 마시고 있다.
점적식과 다른 방식의 더치커피가 있다. 전용 용기에 분쇄된 원두와 찬물을 넣고 10~12시간 정도 우려내서 원액을 추출하는 방식이다. 침출식이다. 이것을 콜드브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주로 거대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예술을 잘 모른다. 음악도 그렇고, 미술도 그렇다. 우린 미술관에 가면 사진 찍기에 바쁘다. 왔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다. 그 흔적을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에 남긴다.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그것을 조용히 안고 돌아서는 이는 흔치 않다. 마음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내기엔 너무 바쁘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
그럼에도 미술관에 가면 작품을 오롯이 느끼고 싶다. 그러나 항상 좌절하고 만다. 작품에 아무리 가까이 가도, 작품과 마음의 거리는 너무 멀다. 작품이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니 흔적이 없다. 현대 미술은 너무 난해하다는 말로 나의 몰이해를 정당화한다. 저자는 아니라며 예술을 대하는 방법을 천천히 보여준다.
어느 예술과의 만남에서든 첫 단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건 좋다’, ‘이건 나쁘다’ 또는 ‘이건 가, 나, 다를 의미하는 바로크 시대 그림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상적으로 처음 1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해선 안 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p114~5
문제는 작품이 아니라 나였다. 내 안에 작품을 넣고 우려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콜드브루처럼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충분한 시간이 찬물에도 불구하고 원두 가루에 스며있는 커피 원액을 서서히 풀어냈듯이, 작품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작품의 이야기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작품을 담을 마음에 여유가 없기에, 나는 이야기를 우려낼 수 없었다. 일반적인 가치판단을 접어두고, 그냥 그림의 곳곳을 봐야 한다.
<여름의 베퇴유>라는 제목의 풍경화가 시야에 가득 찰 정도로 바짝 다가선 나는 내 눈이 이 허구의 세계를 실감 나게 받아들인다는 걸 확인한다. 마을과 강 그리고 강에 떠 있는 마을의 물그림자가 보인다.....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그림은 점차 풍성해질 뿐 결코 끝나지 않는다. p116
이렇게 그림 속에 자신을 투영하여 그림의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이 예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때라고 저자는 믿는다.
나는 우리가 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가까이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예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믿는다. 저 아이들이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그러기 위한 좋은 출발을 한 것 같다. p206
우린 점적식 커피를 더치커피, 침출식 커피를 콜드브루로 부른다. 그러나 둘 다 찬물로 우려낸, 추출 시간도 일반 커피보다 오래 걸리는 커피다. 더치커피가 콜드브루이고 콜드브루가 더치커피다. 마찬가지로 삶도 예술이고, 예술도 삶이다. 예술과 삶은 서로 다르지 않다. 예술은 삶의 이면 또는 삶의 한순간을 포착하여 영원에 가두는 삶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예술은 우리가 세상이 그대로 멈춰 섰으면 하는 순간에서 비롯한다. 너무도 아름답거나, 장엄하거나, 슬픈 나머지 삶을 계속하면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예술가들은 그 덧없는 순간들을 기록해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들은 덧없이 흘러가버리지 않고 세대를 거듭하도록 계속 아름답고, 진실되고, 장엄하고, 슬프고, 기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믿게 해준다. 그리고 이곳 메트에 유화물감으로 그려지고, 대리석에 새겨지고, 퀼트로 바느질된 그 증거물들이 있다. p324
그에게 예술은 삶의 한 조각이었다. 그 조각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어떤 이유로 멈추고 싶은 삶의 순간에 관한 기록이다. 예술은 한 인간을 압도하여 흔들며 삶에 균열을 내는 순간을 포획하여 시간의 힘을 이겨내고, 그 순간의 조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 순간의 조각을 보는 것조차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려준다. 예술은 그의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흔적이 쌓이면서 그의 삶에는 여러 빛깔의 감정이 흘러들 수 있었다. 예술은 감상을 통해 인간의 마음이라는 도화지를 형형색색으로 채색한다. 한 인간의 삶을 회복시킨다. 이 또한 예술이다. 더치커피와 콜드브루가 다르지 않듯, 예술과 삶은 다르지 않다. 그러기에 삶 속에서 그는 또 다른 삶인 예술을 만났다. 바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책을 덮고 표지를 본다. 메트의 1층 그레이트홀과 연결된 2층의 전경이다. 표지에는 녹청색이 배어 나오고 있다. 마치 물속에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녹청색은 과거로 날 회귀시킨다. 녹청색을 청동 유물에서 많이 봐서 그런지 모른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고, 구리가 부식되면 녹청색으로 변한다. 녹청색이 표지를 부식시키고 있다. 부식은 낡음이 아니다. 발견이다. 메트의 시간 정체성을 규정하는 유물들은 낡은 과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새로운 발견을 통해 현재라는 삶을 이해하거나 다가올 미래의 가능성을 통찰하게 한다.
녹청색은 과거다. 책의 시제와 너무 잘 어울린다. 세계와 단절된 메트에서 형에 대한 애도는 철저한 회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메트의 유물도 과거의 산물이다. 메트는 과거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공간이 과거이기에 그는 삶이 미래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바로 그가 ‘예술은 우리가 세상이 그대로 멈춰 섰으면 하는 순간에서 비롯한다. 너무도 아름답거나, 장엄하거나, 슬픈 나머지 삶을 계속하면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순간’이라고 했던 순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과거를 마음을 다해 흩었다. 형과의 추억과 예술을 통해.
표지에서 소실점 같은 끝에 그림 한 점이 보인다. 바로 1729년 조바니 바티스타 티에폴로가 그린 ‘마리우스의 승리’다. ‘마리우스의 승리’는 고대 로마 장군 마리우스가 카르타고 장군 유구르타에게 승리한 것을 자축한 모습의 그림이다. 그러나 나에겐 패트릭 브링리가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삶으로 나오는 것을 자축한 승리의 그림처럼 보인다. 또한 그림은 녹청색에 물들지 않고 컬러로 원래의 색감을 유지했다. 창문 같다. 과거의 공간에 현재와 연결된 창. 형과의 추억과 예술을 충분히 반추했기에 승리를 안고 그는 창문을 열고 나갔다.
더치커피는 오랜 시간에 걸쳐 추출된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뜨거운 물로 추출한 일반 커피와 달리 쓴맛이 덜하고 순하다. 부드러운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더치커피 한 잔으로 그의 책을 비유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난, 책에서 더치커피를 맛본다. 슬픔이 엷어져 쓴맛이 덜하여 부드러운 풍미로 가득한 그의 삶도 상상해 본다. 빈 잔을 돌려주며 책의 마지막 구절을 되새겨본다. 그가 10년 동안 메트에서 우려낸 예술과 삶에 관한 생각을.
세상이 이토록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고 충만하며, 그런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며,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들을 정성을 다해 만들려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신비롭다. 예술은 평범한 것과 신비로움 양쪽 모두에 관한 것이어서 우리에게 뻔한 것들, 간과하고 지나간 것들을 돌아보도록 일깨워준다. 예술이 있는 곳에서 보낼 수 있었던 모든 시간에 고마운 마음이다. 나는 다시 이곳에 돌아올 것이다.
10년 전, 배치된 구역에 처음 섰을 때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다. 때때로 삶은 단순함과 정직만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도 있다. 빛을 발하는 예술품들 사이에서 방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살피는 경비원의 삶처럼 말이다. 그러나 삶은 군말 없이 살아가면서 고군분투하고, 성장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기도 하다. p3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