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 러닝을 하고 싶다. 무릎이 너무 안 좋아,뛸 수가 없다. 쉬는 날에는 2시간 정도 가볍게 걷는다. 되도록 코스를 조금이라도 바꾸려고 노력한다. 오늘은 집 근처 대학교를 통과하는 코스다. 부모와 학생들이 차에서 물건을 내리고 있다. 기숙사에 입사하는 날인가 보다. 기숙사에는 작은 카페가 있다. 테이크아웃만 된다. 그래서인지 가격이 착하다. 커피를 받아 들고 벤치에 앉는다. 다들 분주하다. 그들을 보며 대학도 그 도시가 아닐지 생각한다. 대학생들만을 위한 공간. 그러나 분위기는 너무 다르다.
그녀가 열여섯에 영원히 머문 도시는 영속성을 가진다. 영속성의 도시는 2부 산속 마을과 비교된다. 산속 마을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 현실 공간이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모든 것은 과거가 된다. 현재는 순간일 뿐이다. 영속성과 순간, 이런 비교 때문에 도시와 산속 마을의 관계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연상시킨다. 외부의 교류를 단절시키는 벽과 산, 유일한 활동공간인 도서관의 존재 등 많은 부분에서 도시와 산속 마을의 구조는 닮았다. 마치 이데아와 이데아를 모사한 현실처럼 보인다. 이데아론은 이데아와 현실 사이에 가치의 위계가 존재한다. 이데아가 본질이다. 그러나 도시와 산속 마을에는 그런 가치의 위계가 없다. 상상의 도시, 현실 산속 마을은 각각의 공간일 뿐이다.
별 하나가 있다. 가을 북동쪽 하늘, 페르세우스자리에서 볼 수 있다. 사흘에 한 번씩 어두워진다. ‘악마’라는 의미의'알골'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어둠 때문이다. 사실‘알골’은 쌍둥이별이다. 멀리 있는 지구에서 보면 두 별은 하나의 별처럼 보인다. 두 별이 나란히 있으면 더 밝게 빛난다. 하나의 별이 다른 별 앞에 있거나 뒤로 숨으면 덜 빛나 어두워 보인다. 이것은 사흘에 한 번 일어난다. 알면 이해되나 모르면 기이하게 신비롭다.
두 공간은 쌍둥이별일지 모른다. 상상의 도시라니? 알면 자연스럽고, 모르면 거북하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매직 리얼리즘’이 두 공간은 세계에 존재하는 쌍둥이별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의 이야기에는 현실과 비현실이,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이 한데 뒤섞여 있어.” 그녀는 말했다. “마치 평범한 일상 속의 일들인 것처럼.”
“그런 걸 매직 리얼리즘이라고들 하더군.” 그가 말했다. p626~7
2부에서 그와 카페 여주인이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관해 주고받은 대화다. 매직 리얼리즘은 비현실적인 공간인 도시가 현실적 공간, 어디에 존재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어디에 존재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상상의 도시와 현실의 산속 마을은 병치되어 하나로 보이는 쌍둥이별이 되다. 때론 별이 사흘에 한 번씩 어두워지듯, 현실 산속 마을은 상상의 공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것이 산속 마을, 유령인 고야스 씨가 일상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유다. 이런 면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매직 리얼리즘’은 이 소설의 형식일지도 모른다.
대학교를 나와 걷는다. 커다란 교문을 되돌아본다. 학생들에게 대학은 그들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공간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곳은 그냥 걷는 산책로의 어느 한 공간일 뿐이다. 이와 같지 않을까? 상상의 도시는. 우리는 그곳을 일상 속에서 걷고 통과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그곳이 상상의 도시라는 것을 모를 뿐.
매직 리얼리즘은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계 사이의 신비스러운 관계를 발견하(네이버 지식백과)’려 노력한다. 이런 관점을 하루키도 받아들인다. 그는 특별한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계의 신비스러운 관계를 드러내려고 한다. 특별한 인간은 그, 그녀 그리고 옐로 서브마린 소년 같은 내부로 시선이 향하거나 외부와 소통이 불가능한 현실에 사는 이들이다. 이들로 두 공간의 신비로운 관계를 보여준다.
두 공간은 쌍둥이별처럼 병치되어 있다. 두 공간을 이들이 잇는다. 이들은 현실에서는 하나의 검은 구멍이다. 이들을 현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상의 도시가 필요하다. 상상의 도시에서 그들은 온전한 존재가 된다. 그곳에서 구멍은 메워진다. 이들로 해서 상상의 도시 또한 존재할 수 있다. 이들은 꿈을 읽는 이들이고, 이들이 도시의 위협을 해소하기 때문이다. 두 공간은 병치되면서 이들로 인해 부분적으로 겹쳐있다. 이들은 두 공간의 교집합이다. 그래서 두 공간은 별개의 공간이면서 하나의 공간처럼 된다. 어느 공간이 본질적인지 모른다. 이는 상상의 도시에 있는 그라는 본체, 현실의 산속 마을에 있는 그의 그림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본체와 그림자이기에 가치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공간에서든 살아내고 있다면 그것이 그림자라 하더라도 그 공간에서는 본체가 된다. 그림자는 없다.
철길로 된 공원엔 젊은 연인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서로 보기만 해도 웃는다. 그냥 즐거운 것이다. 나도 그들을 보며 살짝 웃는다. 물론 너무 부럽다. 그 젊음이. 그들이 가진 색은 짙다. 그래서 톡톡 튄다. 나의 색은 너무 바래, 이제는 색의 자리도 알 수 없다.
상상의 도시에 있는 그는 왜 약동했을까? 왜 마음에 색을 입혔을까? 확실한 것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등장으로 그의 감정이 폭발했다는 사실이다. 색에 물든 약동하는 감정으로 인해 그는 도시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카운터 위에 놓인 내 손에 그녀가 손을 포갰다. 매끄러운 다섯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조용히 얽혔다. 종류가 다른 시간이 그곳에서 하나로 포개져 뒤섞였다. 가슴 밑바닥에서 슬픔 비슷한, 그러나 슬픔과는 성분이 다른 감정이 무성한 식물처럼 촉수를 뻗어왔다. 나는 그 감촉을 그립게 생각했다. 내 마음에는 내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영역이 아직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다. 시간도 손대지 못하는 영역이.’ p637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 있는 그의 마음도 감정으로 일렁였다. 카페 여주인에 대한 것이었다. 사랑이다. 그의 마음이, 시간이 알지 못한 영역에 숨어 살아 숨 쉬던 사랑이었다. 열일곱 살에 모든 사랑을 쏟아부어 더 이상 누구를 사랑할 수 없는 그가, 사랑에 실패하여 더 이상 사랑을 할 수 없는 카페 여주인과 시작한 조용한 사랑이다.
양쪽 세계 그들의 감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 둘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양자역학의 양자얽힘이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서로 관계있는 두 입자가 있다. 두 입자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 입자의 양자상태가 결정되면 멀리 떨어진 다른 입자의 양자상태도 즉시 결정된다. 이것이 양자얽힘이다. 산속 마을과 도시의 그들도 이와 같을지 모른다. 현실 산속 마을의 그에게서 먼저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고, 이어서 상상의 도시에 있는 그의 감정이 약동한 것이다. 이 변화에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개입되어 있다.
소년은 비틀스가 나오는 장편 애니메이션 ‘옐로 서브마린’을 프린트한 파카를 항상 입고 있다. 여기서 서브마린, 잠수함의 색은 노란색이다. 노란색은 빨간빛과 초록빛의 혼합색이다. 빨간색은 흥분과 유혹이라는 자극하는, 초록색은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노란색은 자극과 회복이라는 두 가지 효용을 가진다. 이것은 도시의 그에게 약동하는 감정을 자극하고, 산속 마을의 그에게는 잃어버린 사랑의 감정을 회복시켰다. 결국 노란색은 인간의 욕망, 즉 사랑(소설에서는)의 감정을 자극하고 회복시킨다.
사랑의 감정은 다양하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안다. 사랑에는 기쁨, 환희, 슬픔, 분노 등 여러 감정이 있다. 그래서 사랑의 색은 다양하다. 그 다양함은 속표지의 다양한 색의 그러데이션과 닮았다. 속표지는 노란색 바탕에 빨간색과 초록색이 무리를 이루고 있고, 사이사이 다른 색들이 숨어있다. 속표지의 색은 도시와 산속 마을 그들의 감정의 변화 그리고 사랑 그 자체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했다. 산속 마을에서 손님과 주인일 뿐인 그와 카페 여주인의 관계를 소년은‘수요일 태생’이라는 말 한마디로 변화시켰다. 이때부터 그들은 서로 조금씩 다가갈 수 있었다. 사랑의 시작이었다. 소년이 현실의 공간에서 사라지고 상상의 공간에 나타난 후, 도시의 그는 약동하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모른다. 서로 정보의 교류가 없기에, 현실의 그가 느낀 사랑의 감정이라는 사실을 도시의 그는 알 수 없었다. 이것은 소년이 현실에 존재하는 그와 상상의 도시에 있는 그, 이들의 귀를 깨물어 통증으로 서로를 연결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로 인해 비로소 둘 사이에 감정이 흐른 것이다. 현실의 그에게서 상상의 도시에 있는 그에게로. 소년은 매개자였다.
이로써 소설의 1부는 사랑을 잃어버린 과정으로, 2부와 3부는 각각의 공간에서 사랑을 되찾는 여정으로 볼 수 있다. 그 여정은 도시의 그가 사랑에 빠진 산속 마을의 그에게로 떠나면서 마무리된다.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사랑일 것이다.
결국엔 탈이 났다. 너무 걸었나 보다. 무릎도 무릎이지만, 이제 허리도 아프기 시작한다. 허리가 시간을 견뎌내지 못하고 있다. 시간의 무정함을 느끼는 것을 보면, 난 현실 속에 있나 보다. 이런 통증이 다른 세계의 내가 현실의 나에게 보내는 정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벤치에 앉아 그것이 무엇인지 궁리해 본다.
애니메이션 ‘옐로 서브마린’의 정서 중 하나도 사랑인 것 같다. 명대사와 명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간단해, 사랑만 있으면 돼(It’s easy. All you need is love). -존
서전 페퍼 론리 하트 클럽 밴드로 분장한 비틀스 멤버들이 음악을 연주하여 많은 페퍼랜드인들이 깨어나자 블루미니 대장은 가장 강력한 부하인 글로브를 보낸다. 무엇이든 파괴하는 글로브를 맞이하여 존은 글로브(glove)에서 ‘g’를 뺀 사랑(love)을 노래하며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