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 카페는 처음이다. 글을 쓰기 위해 왔다. 집에서 생각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고, 글은 계속 되돌이표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키오스크로 결재하고, 다른 기계에서 컵을 받는다. 그리고 나서야 커피 추출기에서 커피를 내릴 수 있다. 주인은 없고, 키오스크가 주인을 대신한다. 주인이 키오스크로 변신했다.
<변신>은 너무 유명하다. 이야기도 무척 간단하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리 잠자는 벌레로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가족들의 무시와 학대 속에 서서히 죽어간다.
<변신>은 벌레라는 실체를 통해 현대 문명 속에서 ‘기능’으로만 평가되는 인간이 자기 존재의 의의를 잃고 서로 유리된 채 살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그레고리가 생활비를 버는 동안은 그의 기능과 존재가 인정되지만 그의 빈자리는 곧 채워지고 그의 존재 의미는 사라져버린다. 인간 상호간은 물론, 가족간의 소통과 이해가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故 장영희(에세이스트, 영문학자) 책의 뒤표지에서
<변신>에 관한 평가다. 이 평가에 동의한다. 그래서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표지는 이야기할 것, 하나를 남겨놓았다. 바로 프란츠 카프카를 지우는듯한 X이다.
X는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다. 10을 나타내는 로마 숫자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를 Xmas로 쓰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스어로 크리스토스(예수 그리스도:Xριστος, Christ)의 첫 글자가 X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수학에서 자주 만나는 방정식미지수 중 하나도 X다. 방정식에서 미지수는 '아직 알지 못하는 값'을 말한다. 미지수의 의미가 확대되어 X파일, X맨, X레이처럼 ‘알지 못한 사람이나 사물’을 나타내기도 한다. 아마 미지의 X와 관련된 유명한 인물은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가인 말콤 X일 것이다. 그는‘엑스’로 성을 바꾼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틀이라는 본래 성은 백인 악마, 백인 노예주가 붙인 성이므로, 알 수 없는 아프리카 조상의 본래 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중에서 표지에 그려진 X를 미지수 X로 생각해 본다.
커피 맛은 조금 모자란다. 아니 지나치다. 탄 맛이 너무 나기 때문이다. 로스팅의 문제일 수도 있고, 원두의 문제일 수도 있다. 또는 원두의 문제를 가리기 위해 로스팅에서 더 태웠을 수도 있다. 아니면 문제라기보단 원두 본래의 맛일 수도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전문가가 아닌 나로선 알 수 없다.
aX2 +bX + c = 0
중학교 때 배운 이차방정식이다. 방정식에서 세 개의 문자와 하나의 숫자가 보인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문자 a, b, c이다. 이것 중에서 a, b를 계수로, c를 상수로 부른다. 방정식에서 계수는 변수 즉 문자에 곱해진 숫자를, 상수는 변하지 않는 고정된 숫자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5X2 + 3X +1에서 5, 3은 계수, 1이 상수이다.
방정식이 <변신>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계수와 상수는 개별 방정식에서 변하지 않는 고정된 숫자인 상수로 표시된다. 숫자 또는 상수는 명확하다. <변신>에서 직관적으로 명확한 것은 그레고리 잠자,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 외 인물이다. 소설은 사건들의 연속이고, 사건은 인물이 만든다. 인물이 없으면 소설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인물은 소설 속에서 존재해야만 하는 상수다. 상수가 변수에 붙으면 계수이듯, 인물은 상수이기 때문에 미지수 X에 붙으면 계수 또한 될 수 있다. 그럼, 미지수 X는 무엇일까?
그런데 미지수 X를 생각하려니 머리가 아프다. 대신 방정식 우변에 있는 0을 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0은 공허를 의미했다. 그들은 우주가 공허와 혼돈에서 태어나, 이들로 인해서 또한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0은 세계의종말이라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당연히 그들은 0을 혐오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0에 내포된 세계의 종말을 인간의 삶에 적용하면 죽음이다. 인간은 죽음을 알 수 없다. 알지 못하기에 죽음에 관한 모든 물음은 무용한 것이다. 그래서 카뮈는 ‘삶의 끝이 결국 죽음이라면 인생은 부조리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삶의 끝이라는 죽음의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0은 부조리까지 나아간다.
그레고리가 일할 때, 그의 가족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다. 가족은 그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잉여 인간이었다. 그는 그런 가족을 알뜰히 보살폈다. 그러나 그가 벌레로 잉여 인간이 되어 가족에 의지하자, 가족은 그를 버렸다. 그와 가족 사이에 형성된 의무 또는 애정은 비대칭이었다. 그레고리는 그가 행한 방식으로 가족을 이해하려 했지만, 가족은 불이익이라는 잣대로 그를 대했다. 불이익이 커질수록 그레고리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다. 벌레가 된 그가 인간의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이런 비대칭을 완화할 수 있는 소통조차 완전히 차단되었다. 그와 가족 사이에는 거대한 불통의 장벽이 세워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서로가 이해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절망적인 한계상황을 의미하고, 그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해소됐다. 그레고리가 죽자, 가족은 홀가분함을 느꼈다. 그리고 해소가 남긴 것은 부조리였다. 부조리는 실존철학에서는 현실에는 삶의 의미를 발견할 가능성이 없는 절망적인 한계상황을 나타내는 용어(네이버 지식백과)이다. 소통의 부재와 상호 간의 몰이해 속에서 그와 가족은 각자로 인해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바로 이런 절망적인 한계상황인 부조리가 방정식 우변의 0에 닿아있다.
탄 맛이지만 마신다. 탄 맛의 원인을 모르고, 커피가 지닌 원래의 맛이 무엇인지 잃어버렸으니, 이 또한 부조리한 상황인가? 잠시 생각한다. 너무 나아갔다. 주변의 이들은 커피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너무 예민한 탓이다.
그레고리나 그의 가족 또는 인간을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 몰아놓은 것은 무엇일까? 이것을 미지수 X로 놓을 수 있다. 조동일 교수는 문학의 장르를 자아와 대결로 구분하였다. 소설이 포함된 서사는 작품 외적 자아(서술자)의 개입이 있는 자아(인물)와 세계의 대립(갈등)으로 보았다. 눈여겨볼 것은 자아와 세계의 대립이다. 그래서 자아를 인물로 본다면, 인물을 방정식의 계수 또는 상수로 본다면 미지수 X는 세계다. 계수와 미지수 X의 곱, 자아(인물)와 세계의 대결, 그 결과가 우변의 부조리한 상황이다. 방정식을 풀면 미지수 X의 해를 구할 수 있다. 그 해는 특정한 값을 가진다. 그러므로 소설에서 미지수 X의 해는 인간을 부조리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특정한 세계를 말한다. <변신>에 적용하면, 그레고리와 그의 가족을 상호 간의 소통 부재와 몰이해라는 부조리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당시의 세계는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장영희의 평가에 따르면, 그 해는 인간을 기능으로 평가한 현대 문명이다. <변신>에서 그레고리가 다니는 회사가 현대 문명을 대리한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여긴 그에게 회사의 지배인이 한 말에서, 현대 문명이 어떻게 인간을 보는지 확인할 수 있다. 바로 하나의 부속품이다.
“...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우리 사업하는 사람들은-이걸 유감스럽다 해야 할지 다행이라 해야 할지는 좋을 때로 생각할 일입니다만-몸이 조금 불편한 것쯤은 흔히 사업을 생각해서 그냥 참고 넘겨야 하지요” p24
“... 그리고, 당신의 일자리는 결코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오.... 최근 당신의 업무 실적은 사실 매우 불만족스러운 것이었소. 지금이 그다지 영업을 잘 할 수 있는 계절이 아니란 건 알고 있소. 그 점은 우리도 인정하오. 그렇지만 영업을 못할 계절이란 또 절대로 있을 수 없고, 잠자씨, 또 있어서도 안 되지요.” p25~26
무인 카페는 일반 카페와 공간의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분산되어 각자가 조각난 느낌이 든다. 일반 카페에서는 이런 느낌은 없었다. 주인이 있고 없고의 차이 때문일지 모른다. 일반 카페는 주인이 중심을 잡고 있어, 공간이 분산되어 조각나는 것을 잡아 주는 것 같다. 중력처럼. 그래서일까? 난 그곳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미지수 X를 포함한 방정식은 차수를 계속 높일 수 있다. 일차, 이차, 삼차 등의 방정식으로. 이는 미지수 X를 세계로 본다면, 1차, 2차, 3차, 4차 산업혁명 또는 AI 혁명 등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즉 인간의 문명이 계속 발전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방정식에 서 4차까지는 해를 위한 공식이 있다. 흔히 말하는 근의 공식이 있다. 그러나 5차 방정식부터는 근의 공식이 없다. 즉 해를 구할 수 없다. 프랑스의 수학자 갈루아가 군론으로 이것을 증명했다. 이 말은 거듭 발전하는 인간의 문명은 언젠가는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을 영화 <메트릭스>가 잘 그려냈다. 인간은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들이 사는 공간의 실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가상공간인 메트릭스로 말이다. 그래서 불안하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세계가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옆에 있는 <변신>을 본다. X 뒤에 있는 카프카를 본다. 그리고 엉뚱한 생각을 한다. 만약 카프카가 오늘을 살고 있다면, 그는 그레고리를 여전히 벌레로 표현했을까?라는. 아닐지 모른다. 카프카가 살았던 그때와 지금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고 하며, 20세기는 ‘면역학적 시대’라고 했다. 면역학적 시대에는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이고, 타자는 ‘이질적’이고 그래서 ‘제거의 대상’이 된다. <변신>의 내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변신>은 지난 세기, 현대 문명이 수립되던 시기에 쓰였다. 그래서 면역학적 관점에서 그레고리의 인간과는 이질적인 벌레로의 변신, 그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21세기는 병리학적으로 ‘신경증적’이라고 그는 규정한다. 면역학적 시대와는 다르게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성, 동일성이 문제가 된다.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p22
예를 들면 우리는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투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실전 투자에 나선다. 영끌까지 하면서. 그러나 결과는 비참하다. 기회가 있음에도 부자가 되지 못한 것은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성공한 이들이 이야기한다. 자신도 수긍한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이 반복되면, 어느새 자신을 갉아먹고, 에너지는 소진되고, 우울증에 시달린다. 이런 ‘신경증적’ 시대에서 카프카는 그레고리를 인간과는 이질적인 벌레로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질성에 초점을 맞추면, 인간인 듯 인간이 아닌 좀비로 표현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레고리가 죽는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 좀비가 되는 것으로 마무리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것이 좀비가 ‘신경증적’ 세기에 영화에 많이 나오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좀비는 21세기의 그레고리일지 모른다.